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5 Wave by Peter Kwon 권오찬 미용사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 5 Wave by Peter Kwon 권오찬 미용사

일요시사 0 2,055


웨이브 바이 피터 권,이 말에 부끄럽지 않게 살 겁니다


까칠한 손님은 실력으로 대응초심 잃지 않고 겸손하게 최선 다하겠다


 

  거칠 게 없다. 가위가 허공을 가른다. 손놀림이 자유자재다. 뭉툭 뭉툭 잘려 나온 머리칼이 바닥 밑으로 떨어진다. 거울 속에 비친 잘 생긴 청년이 씨익웃는다. 손님도, 미용사도 흡족해한다. 가위로 만든 예술, 미용의 세계는 그렇게 한 사람을 멋지게 바꿔 놓는다.

 오클랜드 시내 중심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 옆에 조그만 골목길이 있다. 더햄 스트리트 이스트 2번지(2 Durham St. East), 100년은 족히 넘었음 직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 있다. 그 건물 2층에 웨이브’(Wave)라는 이름의 업소가 있다.

 

유학 1년 만에 아버지 사업 힘들어 귀국

 권오찬(영어 이름은 피터 권, Peter Kwon)은 이 업소의 대표다. ‘미용실’,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헤어드레서 숍’(Hairdresser Shop)이다. 문을 열자 미용실 특유의 약품 냄새가 밀려 왔다. 바쁘게 손놀림을 하던 그가 내게 다가왔다.

 “~ 어서 오세요.”

 얼굴 생김새가 곱상하다. 직업 탓일까? 아니면 피부 관리를 잘해서? 30대 중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인다. 말도 사근사근하고 예의도 바르다. 서비스 직종에 딱 맞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오찬은 1996 12월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오클랜드로 유학을 왔다.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모의 의지로 물설고 낯설은 땅에 발을 디뎠다. ‘뉴질랜드가 유럽에 있는 나라인 줄 알았다는 그는 Form 4(Year 10) Form 5(Year 11)를 다녔다. 햇수로 2, 하지만 실제 학교에 다닌 것은 한 해도 채 안 됐다.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힘들어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단골로 드나들던 닐로미용실에 취직

 다다음 해(1998) 8월에 돌아왔지만 두 해도 안 있어 한국행 비행기를 다시 탔다. 간경화로 고생하던 아버지에게 간 이식을 해주어야만 했다. 한국에서 가장 나이 어린 간이식 수술이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아버지는 1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많이 방황했어요. 제 앞길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잘 몰랐고요. 학교는 더 다니고 싶지 않아 피시 방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시간을 죽였어요. 단골로 들르던 닐로 미용실의 원장 선생님이 제게 미용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했어요. 2002 3 26일 첫 출근을 했어요.”

 만 스물하나, 친구들은 다 대학을 다니거나 여자 친구를 만나 재밌게 놀고 있는데 오찬은 그럴 수 없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밤늦은 시간까지 바닥을 쓸고 또 쓸고, 손님 머리를 감겨주고 또 감겨주었다. 미용사의 상징 같은 가위집은 손에도 댈 수 없었다.

 1년쯤이나 됐을까. 원장이 오찬을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 경북대 후문에 있는 미용실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으며 수습생의 설움을 견뎠다. 하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위 대신 그가 손에 쥔 것은 빗자루와 샴푸였다. 역시 쓸고 또 쓸고, 감겨주고 또 감겨주는 일뿐이었다. 대신 낮 시간을 활용해 미용학원에 다니며 필기와 실기 시험에 합격한 일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3 7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위집

 오찬은 자신의 직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직업에 회의가 들었다. 몇 해가 지나도 가위 한번 제대로 못 잡는 현실이 부끄러웠다. 결국, 반년 넘게 미용 세계를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닐로 원장이 오찬을 뉴질랜드로 불렀다.

 “미용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3 7개월 만에 첫 가위집을 허리에 찼어요. 제 친구의 머리를 잘라주었어요. 한 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땀이 줄줄 났는데도 이제 정식으로 미용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원장님이 오가시며 웃곤 하셨죠. 마무리는 원장님이 해주셨지만 그때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어요.”

 오찬은 20111월 초, 아는 형과 함께 오클랜드 시내에서 미용실을 차렸다. 자기는 기술만 투자하기로 하고 일을 벌였는데, ‘엄청난 대박이 났다. 한 해 수입이 4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던 미용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성공의 반은 오찬의 덕이었다.

 

개업 1년 넘도록 손익분기점 못 넘어

 2014 11 24, 오찬은 자기 이름을 내걸고 지금 자리에 미용실 문을 열었다. ‘웨이브 바이 피터 권’(Wave by Peter Kwon). 최신식 미용 장비와 멋진 실내장식으로 꾸몄다. 넓이는 60평에 가깝다.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로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뉴욕에 웨이브라는 유명한 미용실이 있어요.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거예요. 우연히 그 뉴스를 보다가 나도 웨이브라는 이름으로 미용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거기다 저는 제 이름까지 넣어 당당히 대결해 보겠다는 도전심이 생기더라고요.”

 오찬은 웨이브’(Wave)라는 상호에다 바이 피터 권’(by Peter Kwon)을 더했다. 현지 손님을 생각하면 바이 피터’(by Peter)까지만 써도 될 것을 굳이 ’(Kwon)까지 넣은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사람의 성()을 뉴질랜드에 널리 알리겠다는 의지다. 그는 웨이브 바이 아무개(Andy, Paul )’ 같은 미용실을 뉴질랜드 지방 도시는 물론 호주까지 진출시켜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웨이브 바이 피터 권은 자신의 능력을 확대해석해 건방지게’(내 표현이 아니다) 시작한 탓인지 개업 뒤 1년이 넘도록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수십만 달러를 들여 호화판 미용실을 꾸미고 손님을 기다렸지만 손익분기점은커녕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다 털어야만 했다.

 


입소문 타며 현재 회원 3천 명 가까워

 그러다가 올해 1월부터 틀이 잡혔다. 공격적인 마케팅이 먹혀 들어갔고 또 입소문이 퍼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손님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등록된 회원만 3천 명에 가깝다.

 오찬의 얘기는 거칠 게 없었다. 나보다 스무 해 정도 어린 나이면 보통 말을 사리곤 하는데 그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제 할 말을 다 쏟아냈다. 인터뷰하기 편한 젊은이라는 뜻이다.

 “제가 서른세 살에 원장이 됐어요. 좀 까칠한 손님들은 제 나이만 보고 무시해요. 그러면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요. ‘실력으로 보여줄게요. 아마 놀라실 거예요.’ 손님 백 퍼센트를 다 만족하게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제 작품에 만족해요.”

 미용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예전과 달라 지금은 미용사도 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제 자식이라도 하겠다면 시킬 거예요. 종종 어른들이 자기 자식이 공부를 못 하면 미용사라도 되라고 하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 말은 틀린 말이에요. 머리 모양이 천차만별인데 그 모양에 맞게 작품을 만들려면 얼마나 머리가 좋아야 하겠어요? 저는 미용실이 무대라고 생각하고, 쇼를 보여준다고 해요. ‘가위로 만든 예술 작품이죠.”

 

손재주 있고 활발한 사람에게 어울려

 오찬은 이 부분에서 목청을 높였다. 안타까움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직업이에요. 아울러 활발한 성격을 지녀야 하고요. 끼가 있는 젊은이라면 더욱더 좋고요. 실력 있는 미용사가 되면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대접을 받을 수 있거든요. 멀리 길게 보고 도전하는 자세로 나섰으면 합니다.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거든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나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닐로미용실 손창곤 원장님과 제 장인인 이강국 장로님(장모 이지영 권사), 그리고 제 아내 이지은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그들의 기대에 맞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멋진 미용사로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사적인얘기는 인터뷰 기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정말로 크게 성공해서 자서전을 쓸 때 자세히 언급했으면 좋겠다는 도움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그 말이 어쩌면 이 인터뷰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영감이 왔다.

 앞날의 자서전을 대신해 짧게나마 그들의 위대함을 여기에 적는다. 손 원장의 조건 없는 사랑, 장인의 10년 넘은 피지 선교,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처럼.’

 오찬은 이 짧은 말이 삶의 신조라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유언장처럼 제게 보낸 편지가 한 통 있어요. ‘시간은 너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낭비하지 마라라는 글이 제 맘에 깊게 박혔어요. 제가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평생 지키며 살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건방지게보일 때마다 따끔하게 질책해 주세요.”

몇 번의 건방짐이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권오찬, 그는 앞으로 더 겸손하게 손님을 모시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약속이 평생 갈 것 같다는 믿음이 들었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Wave-by-Peter-Kwon-564502273695837/

 

_프리랜서 박성기

표지 사진_민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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