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lake Girls High School Vocal Tutor김나영 성악가

시사인터뷰


 

Westlake Girls High School Vocal Tutor김나영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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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의 프리마 돈나꿈 지원해 줄래요


한인 1.5세 성악가 1각종 콩쿠르에서 큰 상 휩쓸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가 부른 <카트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이 노래는 나치에 저항한 그리스의 한 젊은 레지스탕스를 생각하며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소설가 신경숙은 중간 소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이 노래를 종종 듣는다. 특히 가사에 나오는 11월에는 더 자주 듣게 된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바닷가로 가 차 안에서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이 곡을 듣다 보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황홀함이 밀려온다. 명곡이 주는 힐링(치유)이다.

 

동생 따라 성악 교습 갔다가 성악가 꿈꿔

성악가 김나영을 만났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공연을 이틀 앞둔 날(11 24)이었다. 그는 공연 준비를 하느라 여러모로 바쁜데도 시간을 내주었다.

1996년 어느 날, 나는 그를 처음 보았다. 오클랜드 어느 교회 부흥회 자리였다. 거기서 그는 특송을 했다. 소프라노 김나영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멋진 성가를 불렀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는, 다시 스무 해가 지나 내 인터뷰 인물이 되었다.

나영은 중학교 때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동생 들러리로 갔다가 나중에 성악을 전공하고, 또 성악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르렀다.

제 여동생이 노래를 씩씩하게잘했어요. 어머니가 엄마가 동생을 성악가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던가 봐요. 동생을 혼자 보내기가 좀 그래 저를 끼워 보냈어요. 그런데 성악 선생님이 동생보다 제가 더 재능이 있다며 성악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보라고 권하셨어요. 원래 저는 역사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진로를 성악 쪽으로 바꿨어요.”

나영은 1994년 이화여대 음악대학 성악과에 입학했다.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도 조수미 같은 훌륭한 소프라노가 되겠노라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조수미가 막 뜨고 있을 때였다. 4년 뒤 성악과를 수석 졸업한 이력에서 보듯 그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유학 문 두드렸지만 고배 마셔

새 천 년을 한 해 앞둔 1999, 나영은 부모가 살고 있던 오클랜드로 건너왔다. 원래는 미국이나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차피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면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가 있는 곳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1년 동안 영어를 다진 뒤 그다음 해, 오클랜드대학 음대대학원이 개설한 오페라 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뉴질랜드 음악을 좀 알게 되자 성악에 더 깊게 빠져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2년짜리 음대대학원에 적을 두고 각종 콩쿠르에 나가 상을 휩쓰는 등 본격적인 성악가 길로 나서게 됐다.

2001 11, 나영은 미국 뉴욕과 워싱턴을 방문했다. 성악가로 활동하려면 오페라단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미국이 적격이었기 때문이었다. ‘큰물에서 경쟁자들과 한판 대결을 펼쳐보고 싶었다.

대학원 2학년 끝 무렵이었어요. 유명 성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미국 유학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떠난 거예요. 그런데 오디션을 앞두고 감기에 걸려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어요. 몇 년을 준비해 왔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제 꿈이 산산조각이 났어요.”

나영은 어쩔 수 없이 오클랜드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을 절치부심하며 실력을 키워 나갔다. 2003년 나영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왕립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 그곳에서 프리마 돈나(‘1의 여인이라는 뜻으로,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소프라노 가수)를 꿈꾸며 세계 곳곳에서 온 음악인들과 경쟁을 했다.

오페라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치렀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더할 나위 없이 잘했다고 믿었어요. 교수님들도 무난하게 합격할 거로 전망했고요.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아시아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나 봐요. 서양 오페라에 동양 사람을 쓸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자기가 정말로 음악을 사랑하는지 고민해야

그날 나영이 겪었을 슬픔이 내게 전해졌다. 한 젊은이의 창창한 앞길이 막혔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렸다. 그나마 나영의 마음속 반론이 내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때 이런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동양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나비부인>(일본의 몰락한 집안의 딸)이나 <투란도트>(중국 공주의 이야기를 다룸)에는 결코 서양 사람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도 되는 것 아니냐고요.”

나영은 이 일을 계기로 성악가의 길을 포기해야 하나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위로가 되어 준 사람이 오클랜드대학 음대대학원에 다닐 때 자기를 가르쳐준 교수였다.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나영아! 하나님이 한 문을 닫았을 때는 열린 또 다른 문을 준비해 놓으셨다고요. 그러시면서 너는 가르치는 재능도 있으니까 후배들 키우는 일에 몰두해 보라고 하셨어요. 제게 큰 힘을 실어준 말씀이지요.”

이 얘기를 듣는 내내 내 마음이 거북했다. ‘열린 문보다 닫힌 문때문에 그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어서였다. 화제를 좀 바꿨다.

성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일사천리로 말을 이어오던 나영이 잠시 주춤했다. 순간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전해져 왔다.

노래(성악)만으로 밥을 먹고살기가 힘들어요. 잘 나가는 성악가는 정말로 얼마 안 되거든요. 무엇보다 자기가 음악을 사랑하는지 자문해보는 게 중요해요. 사랑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는 포기하게 되고 말거든요.”

 

칼리지에서 성악 강사로 후학 지도

나영은 칼리지 성악 강사(tutor) 일자리를 얻었다. 후배들을 가르치며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힘을 얻었다. 2006년 마운트 로스킬 그래마 스쿨(Mount Roskill Grammar School)을 시작으로, 웨스트 레이크 걸스 하이 스쿨(Westlake Girls High School), 다이오세슨 스쿨 포 걸스(Diocesan School for Girls)같은 음악 명문학교에서 한때 자기처럼 프리마 돈나꿈을 가진 학생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한국의 예술고등학교 같은 게 없어요. 그런데도 음악 대학에 가는 학생을 배출하고, 세계적인 성악가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저 같은 강사의 도움 때문이라고 믿어요. 유명 학교 합창단에 들어가려면 전문 성악가의 교습이 필요하죠. 제가 바로 그 일을 해주고 있어요.”

나영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기도 배운다고 했다. 아직은 성악가라는 호칭을 놓치고 싶지 않아 꾸준히 연습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콩쿠르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그가 다시 한 번 비상의 날개를 펴기 위해 천상의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후배들 가르치는 일과 제 노래를 열심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흔히들 소프라노는 40대가 최정상의 기량을 뽐내는 시기라고 해요. 저도 그것을 만끽해보려고요. 제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서 성악가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어요.”

뉴질랜드 한인 1.5세 성악가 1, 김나영.’

이 말이 주는 뜻은 상당히 깊다. ‘다음 세대를 잇는 그 자리에 그가 있다. 교민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균형적인 발전이 절대적이다. 그 가운데 문화 예술도 큰 몫을 한다. 사람이 먹고만 산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책도 읽고, 그림도 감상하고, 음악도 즐기며 살아야 진정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왜 돈을 주고 음악회를 가느냐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그렇게 살면 사람 마음이 삭막해지죠. 몇십 달러만 투자하면 마음이 치유되는 공연을 관람할 수 있어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교민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요. 문화 예술은 풍성한 삶을 만들어 주거든요.”

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시키려면 10대 초•중반 엄청난 문화 충격(Culture Shock)을 주라는 말이 있다. 세계적인 성악가의 실제 공연을 지켜보게 해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꼭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오페라도 좋고, 뮤지컬도 좋고, 연극도 좋다. 그 문화의 기운이 평생 간다는 것이다. 나름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이다.

 

성악가 김나영과 인터뷰를 하고 온 날 저녁, 나는 그가 제일 좋아한다는 소프라노 홍혜경이 부른 <그리운 금강산>을 들었다. 홍혜경은 조수미, 신영옥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소프라노로 꼽힌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자, 그 주인공이 갑자기 김나영처럼 느껴졌다. 그 어느 날, 그게 어느 공간에서든 현실이 되기를 꿈꿔본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_프리랜서 박성기

 

성악가 김나영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성악과 수석 졸업

-오클랜드대학 음악대학원 석사(First Class Honours)

-Fowlds Memorial Prize (for the most distinguished student) 수상

-Pears Britten, Marie D’Albini, Anne Bellam Scholarship 수상

-영국 왕립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 최고연주자 과정 수료(Distinction 졸업)

-Becroft Grand Operatic Aria Competition 1위 입상

-North Shore Performing Art Competition에서 Ladies Vocal Championship과 Most Promising Vocalist상 수상

-Linda Wooten Memorial Award 1위 입상

-Napier Hawke’s Bay 2000 Aria Competition 2위 입상

-Rotorua Lockwood Aria Competition 2위 입상

-NZ Opera Society Scholarship 수상

-Aotea Centre Performing Arts Scholarship 수상

-여러 오페라에서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Suor Angelica>의 Suor enovieffa, <Hansel & Gretel>의 Sandman, <A Christmas Carol>의 Ghost of Christmas Future )

-Auckland Choral Society 합창단과 <Durufle Requiem>에 솔리스트로 공연

-Hamilton Civic Choir 헨델의 오라토리아 <메시아> 솔리스트 공연

-Handel Consort & Quire 합창단과 Handel의 Oratorio <La Resurrezione>, <Alexander’s Feast>, <Jephtha>, <The Triumph of Time and Truth>에서 솔리스트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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