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19) Coolzone(쿨존냉동) 민동혁 냉동기술자

시사인터뷰


 

한인 사회, 다음 세대를 잇는다(19) Coolzone(쿨존냉동) 민동혁 냉동기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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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처리의 원칙은 정확.정직.깔끔입니다


컨테이너 냉동고 회사와 수리 계약…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회사 창립

 

 

나이 들어 해외에 나가 살려면 기술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게 좋지.”

주위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영어도 안 되고, 현지 사회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말에 무릎을 친다. 그런 기술이 뉴질랜드에서는 귀하게 쓰인다. 건축자(builder)나 배관기술자(plumber), 전기기술자(electrician) 같은 사람들이다.

 뉴질랜드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기술자를 한 번 부르면 얼마나 많은 돈이 나가며, 또 얼마나 일 처리가 늦게 진행되는지를. 지금은 한국 기술자들이 더러 있어 껄끄러운 문제가 다소 해결되기는 했지만 아직 100% 만족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뉴질랜드 현실을 잘 아는 1.5세 기술자가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서다. 다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자에만 관심이 있어 자녀들을 실생활에 필요한 기술자로 키우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냉동기술자 초창기 시절.



대학 그만두고 일요시장에서 장갑 팔아

 이번에 소개할 주인공은 냉동기술자다. 그의 이름은 민동혁, 쿨존냉동(Coolzone) 대표다.

그는 1993 2,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와 함께 오클랜드로 이민 왔다. 같은 해 머레이스 베이 인터미디어트(Murrays Bay Intermediate)에 입학, 파란 잔디를 누비며 신나게놀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뉴질랜드 이민 안내 책자를 집에 가지고 오신 게 기억납니다. 책자 표지에 제 또래 아이가 잔디 구장에서 뛰노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흙먼지 나는 운동장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 좋 은 나라에 나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었습니다.”

 동혁은 랑기토토 칼리지(Rangitoto College)를 거쳐 로즈미니 칼리지(Rosmini College)를 마쳤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해, 동혁은 AUT대학 광고학과에 들어갔다.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 근무하는 게 멋져 보였다. 하지만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창의성이 부족해 적성이 안 맞는다는 판단을 했다.

 다음 해 같은 대학 전자공학과로 옮겼다.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은 자신이 있어 뛰어들었지만 공부는 수학 같은 골치 아픈것뿐이었다. 그해 말 학교를 때려 치웠다. 두 번째 실수였다. 다음 해 동혁은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타카푸나(Takapuna) 일요시장(Sunday Market)에 좌판을 펼쳐 놓고 목장갑을 팔았다. 여섯 달 뒤 부모가 운영하던 채소가게에서 물건을 떼어와 함께 팔았다.

 “평일에는 장갑 외판을 나갔습니다. 그때 사회의 쓴맛을 많이 봤습니다. 문전박대도 숱하게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요시장을 2년 동안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냉장 기기압을 재고 있는 동혁.


2003 MIT 냉동학과에 입학

 동혁은 2003, 마누카우에 있는 MIT(Manukau Institute of Technology) 냉동학과에 입학했다. 1년짜리 자격증(NZ Certificate in Refrigeration and Air Conditioning, Level 3) 과정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대학을 졸업했거나, 직장을 잡아 일을 시작할 때 동혁은 새내기 학생이 된 것이었다.

 “딱 제 적성에 맞았습니다. 제가 기계를 갖고 노는 걸 좋아하는데 이런저런 실험도 하고 연구도 할 수 있어 맘에 들었습니다. 파이프 용접도 하고 열량 계산도 하면서 냉동기술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동혁은 말을 재미있게 했다. 조금은 슬픈 추억일 수도 있는 옛날 일을 덤덤히 털어 놓았다. 글로 옮기기 힘든 사춘기 반항 시절, 놀고 또 논 20대 초반 시절, 그리고 20대 중반이 되어 다시 학업을 시작한 일들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풀어나갔다.

 어느 소설가는 “젊은이는 실수할 특권이 있다”고 했다. 100% 동의하는 말이다.

 동혁은 이 대목에서 내 예상을 찌르는 말을 했다.

 “언럭키(unlucky)하게도 취직을 못 했습니다. 졸업 전 30~40%는 취직이 되는데 저는 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놀았습니다. 마침 연말연시이기도 해서 신나게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면서 젊음을 즐겼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데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동혁의 얼굴 표정 속에서 ‘그 뒤 얘기를 들어보시면 놀랄걸요’하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럭키하게, 아니 당연히 동혁은 얼마 안 있어 취직이 됐다. 교수가 그를 한 냉동회사에 추천해 준 것이다. 단 한 번 만에 냉동 컨테이너 수리 회사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3년 반을 일했다. 조금은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컨테이너 냉장 설치 50대 주문 제작을 마치고.


첫 직장에서 영어 안 통해 어려움 겪어

 “열 명에 가까운 직원이 다 키위(백인)였습니다. ‘스모코 타임’(smoko time)이라고 하는 휴식 시간에 직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60%밖에 이해가 안 됐습니다. 저도 10년 넘게 뉴질랜드에 살았고, 또 모든 교육을 받았는데 그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좀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인 만큼 슬랭(속어, 은어)도 많이 쓰고, 한인들 일상생활에서는 듣기 어려운 말을 자주 사용해 그랬을 겁니다. 다행히 한 동료가 친구가 되어줘서 1년 만에 잘 어울리게 됐습니다.”

 경력을 쌓은 동혁은 오클랜드 북쪽 실버데일(Silverdale)에 있는 상업용 냉동 수리 회사로 옮겼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컨테이너 냉동고 수리에 싫증이 날 무렵이었다. 그는 새 회사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냉동 관련이라면 못 고치는 게 없을 정도로 전문가 수준이 되어 있었다. 연봉도 9만 달러 가깝게 받았다.

 동혁의 나이 스물일곱, 당시 그의 무릎 밑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지금은 세 아들의 아빠다) 일찍 결혼한 탓에 어깨의 짐도 무거웠다. 무리해서 산 집의 모기지(mortgage, 집담보대출)도 목을 조르고 있었다. 결심을 해야만 했다. 월급쟁이로 남을지 아니면 창업가로 도전에 나설지. 동혁은 후자를 택했다.

 “창업 자금은 5천 달러였습니다. 한국에 계신 장인이 도움을 주신 겁니다. 그 돈의 반으로 영업용 밴을 샀고, 나머지는 운영 자금으로 썼습니다. 다행히 퇴사하기 전 냉동 컨테이너를 80대 정도 가지고 있는 회사와 도급업체(contractor) 계약을 맺어 놓은 상태라 큰 걱정은 없었습니다. 럭키(운이 좋았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 이름은 쿨존냉동(Coolzone)으로 정했다. 초창기 손님은 한국 사람과 키위가 반반이었다. 현재는 키위가 80%, 한국 사람이 20% 정도다.

 “몇 년 전 저희랑 도급업체를 맺은 회사가 팔렸습니다. 인수한 회사는 냉동 컨테이너를 300대나 넘게 갖고 있습니다. 다 제 일거리였습니다. 그때 직원을 한 사람 고용했습니다.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차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는 냉동고 수리점. 부두에서 바람을 쏘고 있다.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일거리 찾을 수 있어

 냉동기술자로 일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물었다.

 “단층집보다 더 큰 냉동저장 창고를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를 보냈는데도 해결책을 못 찾았습니다. 주인에게 ‘나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 주인이 저를 믿고 시간을 더 주었습니다. 그가 내민 다른 수리 명세서를 보고 답을 찾았습니다. 그때 저를 믿어준 그 주인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동혁은 후배들에게 어떤 도움말을 해주고 싶을까?

 “이 일은 좀 털털한 사람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냉동고나 냉동 창고에 수만 수십만 달러 가치의 물건이 들어 있어 제때 못 고치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쓴소리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기계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고요.”

 한인 냉동기술자 1호, 민동혁.

 동혁은 공부에는 관심이 좀 적고, 기계에는 관심이 많은 후배에게 이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의 전망도 좋고,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에 가더라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한다.

 “혹시 냉동.냉장 문제와 관련해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확실하게 집어서 어떤 게 잘못되었는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부모 세대의 헌신과 희생으로 우리 세대(1.5세)가 틀을 잡을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제 기술이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일의 원칙인 정확하고, 정직하고, 깔끔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동혁은 이십 대 중반에 결혼, 세 아들을 두고 있다. 

 

 이 지면에서 다 쓸 수 없었지만, 인터뷰 내내 내가 본 동혁은 ‘쿨’(cool)했다. ‘멋졌다’는 뜻이다. 말도 쿨했고, 자세도 쿨했다. 한인 사회에 그런 멋진 젊은이가 있어 나도 기분이 쿨해졌다.

 교민 사회가 균형 있게 커 나가려면 여러 계층의 전문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한 부분을 민동혁이 맡고 있어 내심 마음이 놓였다. 부모 세대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가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히 이즈 어 쿨 가이.’(He is a cool guy. 그는 멋진 남자다.)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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