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친일재산 환수' 이우영 돈 228억 향방은?
▲ 그랜드힐튼호텔
나라 팔아먹고 아직도 ‘떵떵’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과거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토 카뮈가 말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미특위) 강제 해산 이후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던 친일재산 국고 귀속 작업이 올해 완료될 전망이다. 현재 관련 소송은 단 2건만 남았다. 2건의 주인은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소송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 회장의 228억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해승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친일파이다. 그는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고종과 인척 관계로 조선 왕족이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일본에 협력한 대가로 매국공채 16만2000원(현재가치 20억원)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기간 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이해승은 일제 육·해군에 각각 1만원씩 국방헌금을 전달했다. 해방 후 반미특위는 이해승을 체포했지만, 반미특위가 해체 돼서 풀려났다. 이해승은 6·25 전쟁 중 납북돼 행방불명됐고, 1957년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
땅 받아 호텔사업
이해승의 장남은 1943년 사망한 상태여서 손자인 이우영 회장이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회장은 1957년부터 옛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돼 있던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까지 신탁재산의 75%인 땅 890만㎡를 되 찾았다. 이 중 절반가량인 435만㎡를 매각했다.
1988년 이 회장은 반환받은 토지 중 전계대원군의 처 용성부대부인의 묘가 있었던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지었다. 이후 이 호텔은 그랜드힐튼호텔로 바뀐다. 특1급인 이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동원아이엔씨로 이 회장의 아들이 대표로 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재산조사위)가 발족하면서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회장의 그랜드힐튼호텔부지와 성북동 자택 등이 그 대상으로 결정 돼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재산조사위는 2007년 11월 이 회장이 소유한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임야 118만㎡를 비롯해 경기도 평택시, 충북, 서울 은평구 땅 192만여㎡를 친일재산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시가로 320억원에 달하는 땅이었다. 재산조사위는 포천시 설운동 임야와 서울 은평구 토지 등 185만㎡(시가 228억원에 상당)에 대해서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재산조사위는 140만8000㎡의 땅은 이해승이 1910년~1932년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땅이므로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회장은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친일행각으로 얻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2008년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들을 고용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전이 시작됐다.
이 회장은 조부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만, “이해승은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조선왕실 종친들을 회유하고 포섭했다. 이 회장은 왕족인 이해승도 포섭 대상이었으며, 작위를 거부하지 못했을 뿐 친일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는 논리다. 또 이해승이 일제에게 받은 땅은 협력한 대가가 아니라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 회장이 제기한 첫 소송에서 재판부는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항소한 이 회장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는 “국가귀속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1심을 뒤집는다. 재판부는 이해승이 한일합병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해승이 일제의 한일합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다는 데 대한 역사적·도덕적 비난은 별개의 문제”라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같은 소송의 다른 하급심 소송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판결은 5개월 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 회장은 첫 소송에서 320억원 상당의 땅을 지켜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를 재산 귀속 대상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회장 측은 이를 이용해 ‘한일병합의 공으로’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재산 귀속 대상자가 아니라고 주장해 승소했다.
▲ 대법원
대법원의 판결은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이해승의 한일합병 이후 친일 행각이 인정되는데도 후손이 상속받은 친일 재산을 환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별법의 문구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국회는 2011년 5월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의 대표발의로 서둘러 특별법을 개정했다.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한일합병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자’라면 모두 친일 재산 국가 귀속 대상이 됐다. 국회는 당시 ‘한일합병의 공’ 이라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추상적인 문구이며, 친일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작위를 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미 확정된 소송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나머지 소송을 의식한 법 개정이었다.
이 회장은 개정된 특별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섰다. 그는 2011년 12월 진행 중이던 관련 소송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했다. 이 회장은 “친일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기만 해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며 개정 특별법의 처분이 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정인을 겨냥한 법 개정이 평등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재산환수법 10년 만에 마무리 눈앞
친일파 왕족 이해승 유산판결 주목
하지만 헌재는 특별법 개정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자’는 일제의 반민족적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깊이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봤다. 또 일제의 귀족이 됐다는 의미를 짚었다. 헌재는 “일제의 귀족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형성된 친일 세력의 최정점에 있는 상징적 존재”라고 평가했다.
지위 자체만으로 친일 세력의 형성과 확대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 체제의 유지·강화에 협력해 조선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일제의 작위를 반납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은 예외로 인정하는 조항이 있다는 점도 참작됐다.
정부는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 회장과 관련된 모든 소송에 승소했다. 2013년 정부는 국가 귀속 절차까지 마친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땅 4만여㎡에 대해 이 회장이 제기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항소심 소송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승소했다. 이해승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지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재판과 서울 은평구 토지 12필지에 대한 소송에서도 정부가 이겼다.
오히려 정부는 이 회장을 상대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번 돈 228억원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2월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재판부는 “개정 특별법에 따라 이해승은 친일반민족 행위자에 해당한다”며 “해당 토지도 일제의 식민지 토지정비 정책에 편승해 받은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 회장 측은 소송에 불복, 패소한 모든 사건을 상급법원에 상소했다.
최종 2건만 남아
지난 1일 법무부는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결정으로 국고 귀속이 결정된 토지에 대한 소송 96건 중 94건이 상고심까지 확정됐고 2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라고 밝혔다. 이 2건은 모두 이 회장이 제기한 소송이다. 이 회장은 정부가 환수한 친일재산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행정소송 1건과 국가가 이 회장을 상대로 친일재산 처분으로 인한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며 낸 국가소송 1건이다.
이들 사건은 모두 연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선고될 전망이다. 법조계에서는 “현재 계류 중인 2건도 1·2심에서 정부 측 손을 들어줘 국고에 환수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친일재산 환수 현황
친일세력이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해 후손 등에게 넘긴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사업이 착수 10년 만인 올해 모두 마무리될 전망이다. 이 사업의 법적 근거가 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 환수에 관한 특별법’이 2005년 시행된 이후 정부 차원의 조사 활동을 거쳐 친일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까지 대부분 완료됐다.
소송은 3가지 종류다. 친일파의 재산을 후손이 처분해 얻은 부당한 이득을 되돌려받기 위해 정부가 소송 원고로 참여하는 국가소송이 96건 중 16건을 차지한다.
정부가 친일 재산을 국고로 돌려놓은 데 대해 후손 등이 불복해 낸 행정소송이 71건, 국고 환수 작업의 위헌성을 따지려고 제기한 헌법소송이 9건이다. 확정된 소송 94건 중 정부는 91건에서 이겨 전체 승소율 97%를 기록했다.
사건 유형별 승소율은 국가소송 100%(15건), 행정소송 96%(70건 중 67건), 헌법소송 100%(9건) 등이다. 정부가 패소한 것은 행정소송 3건에 불과했다. 문제의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였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친일행위자로 지목한 인물이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인지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경우로 판단된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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