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비자금 '그림 세탁설'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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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전두환 비자금 '그림 세탁설'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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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사회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가 천문학적인 규모의 명화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림을 보관한 수장고가 오산에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그 배경과 실체는 무엇인지 <일요시사>가 추적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인 박수근의 작품이 경매에 나왔다. 작품 이름은 '빨래터'. 이른바 세기의 경매로 불렸던 지난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의 낙찰가를 기록했다. 만약 이런 '세기의 명화'들이 한 수장고 안에 수십점이 보관돼 있다면 그 환산가치는 얼마나 될까.

전두환의 큰아들
그림을 사랑하다

지난 6월 20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명화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날 민주당 신경민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미술계 쪽 상당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첩보"라며 재국씨의 명화 수장고 의혹을 제기했다.

신 의원은 미술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 "경기도 오산 인근에 천문학적 규모의 명화 수장고가 있다"면서 관련 내용을 증언했다. 1990년대부터 재국씨의 대리인격인 전모(55)씨와 한모(52)씨가 화랑을 돌아다니며 명화 컬렉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자는 해당 내용의 확인을 위해 복수 국회 관계자와 만났다. 하지만 명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신 의원 측도 마찬가지. 하지만 신 의원 측은 "그런 첩보가 전해 들어 온 것은 사실"이라며 수장고의 존재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재국씨의 명화 수장고 소유 여부는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기자가 접촉한 한 미술계 관계자는 "수장고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부터 재국씨가 어떠한 그림을 사고팔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재국씨가 그림을 비롯한 순수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소문이 맞다"고 확인했다.

재국씨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러나 미국 유학 생활 당시 재국씨의 관심은 온통 미술에 쏠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학 도서관보다 뉴욕에 있는 유명 미술관을 찾는 일이 더 잦았던 재국씨는 1980년대부터 미술 비평을 비롯한 국내외 미술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장남 재국씨 유명 작가 명작들 거액매매 의혹
국보급 문화재도?…'검은돈' 은닉 소문 파다

회화는 물론이고 순수 예술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재국씨는 군사정권의 탄압을 피해 뉴욕에 머물던 가수 겸 사진작가 한대수씨와의 친분을 쌓았다.

재국씨에 대한 한씨의 평가는 굉장히 인상적인데 한씨는 "그(재국씨)는 명백히 사회 엘리트 계층이 키워낸 인물"이라며 "세계 지도자들과 교육받은 장군들과 외교관 틈에서 자란 청년, 나는 그렇게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전(전두환) 대통령이 다시 보였다"고 호평했다. 이후 한씨는 재국씨 소유 갤러리인 '아티누스'에서 2003년 11월 사진 전시회를 열어 인연을 이어갔다.

체제에 저항한 예술가와 독재자의 장손. 이 기묘한 궁합은 재국씨의 그림 수집과도 연관된다. 전 전 대통령이 금기시한 민중미술 작품을 재국씨가 사들인 것.

한 민중미술 작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990년대 민중화가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어떻게 그 사람에게 그림을 팔 수 있냐'고 언성을 높였던 일화가 있었다”며 "재국씨가 미술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큐레이터 1세대
전재국과 통하다

귀국 후 재국씨가 공을 쏟은 일은 국내 미술시장을 파악하는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국내 갤러리가 밀집한 서울 강북 일대가 재국씨의 활동 무대였다.

1990년 재국씨는 그의 외삼촌 이창석씨가 운영하는 출판사에 투자하며 출판업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같은 해 미술서적 출판을 주력으로 한 시공사를 설립했다.

국내 미술계에서 1990년대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 전문 큐레이터(학예사)를 중심으로 한 미술 평론과 시장 구축이 본격적으로 태동됐던 시기이기 때문. 당시 재국씨는 큐레이터 1세대격인 정준모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와 박영택(현 경기대 예술대학 교수)씨 등과 활발히 교류했다. 그리고 이때 만났던 인연이 바로 재국씨의 대리인으로 알려진 전씨와 한씨다.

27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본회의가 열린 가운데
▲27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본회의가 열린 가운데 '공무원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재석 233석, 찬성 227석, 반대 2석, 기권 4석으로 가결처리되고 있다. 나경식 기자(rusia1973@ilyosisa.co.kr)
전씨와 한씨는 모두 큐레이터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미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업계의 평판이 높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씨와 달리 전씨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사생활이 베일에 싸여있다.

한씨는 경기 남부의 유명 갤러리인 H갤러리에서 1992년까지 큐레이터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9년부터 재국씨 소유 갤러리인 아티누스에서 갤러리 디렉터로 일했다. 이후 한씨는 돌연 전업 작가로 전직했다. 서양화가인 그는 지난 3월 서울 청담동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한씨는 외부 연락을 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렵게 접촉한 그에게서 수장고의 행방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한씨는 "내가 재국씨의 대리인으로 그림을 사들였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며 "재국씨가 미술 애호가로써 그림을 사들인 건 맞지만 어떤 경로로 샀고,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을 피했다.

한씨는 전씨와 함께 지난 1994년 아티누스 건립의 총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한씨는 재국씨로부터 화랑 관리와 미술품 수집 등을 위임받았다. 재국씨가 본격적인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재국씨와 함께 일했던 한 내부 관계자는 "신 의원의 주장이 너무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재국씨가 대량의 미술품을 소유하게 된 배경에 다른 사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관계자는 "재국씨의 그림 수집이 개인의 기호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지 비자금 은닉 차원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재국씨가 박수근·천경자 등 유명 작가들의 명화를 보유했던 것은 맞다"고 확인했다.

"유명 작가들
 작품 샀었다"

재국씨는 지난 1993년 한씨, 전씨와 함께 <아르비방>(생동하는 미술)이라는 미술 전문잡지를 준비했다. <아르비방>은 당시 젊은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기 위한 의도로 기획됐다. 1994년 출간한 <아르비방>은 1996년까지 모두 55편이 제작됐다. 각 호마다 1명의 신진작가가 <아르비방>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자신을 다뤄준 잡지를 살 돈이 없던 작가들은 <아르비방>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자신의 그림을 재국씨에게 선물했다. 이렇게 받은 그림들이 외부로 와전이 돼 '천문학적인 명화'로 둔갑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당시 무명이나 다름없던 작가들의 작품이 팔려봐야 얼마나 했겠냐"면서 "지금 그 작가들의 그림이 유명해졌다고 하더라도 경매가의 총합은 아마 10억원이 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재국씨가 '다른 그림'을 사들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더불어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박수근, 천경자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을 처분한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재국씨는 '권력가 2세' 컬렉터 중 1세대로 꼽힌다.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순수한 취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의 미술품에 대한 수집욕은 남달라서 때때로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난 2000년 국보급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에 조건 없이 2억원을 내밀었다는 소문은 미술판에 파다했다. 간송미술관 측은 "재국씨로부터 공식적인 제의는 없었다"며 소문을 부인했다. 2000년은 재국씨가 서울 시내 대형서점인 을지서적을 인수하는 등 자금력이 극에 달해있을 때로 알려져 있다. 이 자금 중 일부가 명화를 사들이는데 들어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베일에 싸인 재국씨의 대리인 전씨의 행적도 의문이다. 그는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 청담동의 한 갤러리 대표를 지내면서 재국씨와 자주 만났다. 서울 역삼동 한 일식집에서 재국씨와 전씨가 사업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는 일화도 들렸다. 그러나 이들의 확인된 커넥션은 따로 있었다.

대리인 내세워 거래오산에 명화 수장고?
한점에 수억∼수십억…처분한 돈 어디로 갔나

재국씨와 전씨가 <아르비방>을 준비하던 1993년 3월, 전씨는 서울 서초구 신반포 15차 아파트를 매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전씨는 매입한 아파트를 담보로 신한은행으로부터 2억4000만원을 빌렸다.

해당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1993년 11월 시공사는 전씨의 채무를 떠안은 것으로 확인됐다. 즉 시공사 대표인 재국씨가 전씨의 아파트를 사들인 것이다.

이 아파트는 2000년 전 전 대통령의 딸 효선씨에게 매매됐고, 시공사가 진 채무는 2006년 3월 해지됐다. 이후 효선씨는 2010년 9월, 21억2000만원에 이 아파트를 매도했다. 즉 재국씨가 전씨의 명의를 빌려 서초구 아파트를 매입하고, 이를 다시 효선씨에게 넘겼다는 의혹인 셈이다.

현재 전씨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다. 과거 전씨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던 한 유명 작가는 "전씨와 연락이 안 된다"며 "갤러리를 하다가 갑자기 문을 닫았고, 이후로는 (내가 그린) 드로잉 한 점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작가는 최근 몇 년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에 꼽힐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전씨가 유명 작가의 그림을 몰래 빼돌린 셈이다.

수상한 오산땅
미술품 어디있나

재국씨와 친분이 있는 한 관계자는 "그림 경매가가 피크에 올랐을 때 재국씨가 명화를 다 팔았다"는 정보가 있었다며 "만약 이 매각대금을 추징금 얘기가 나온 시점인 2004년 전에 다른 경로로 보냈다면 아마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귀띔했다.

전두환 일가는 금고지기 이씨를 우회해 규모 132만㎡의 오산 땅을 소유했었다. 재국씨가 수장고를 감추기에는 충분한 규모. 기자는 경기 오산에 살고 있는 복수 미술계 관계자에게 문의, 수장고 위치를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취재를 도운 한 관계자는 "수장고라는 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만들 수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며 "인근 골프장 등에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기자는 서울 평창동의 '시공아트스페이스'를 찾았다. 시공아트스페이스는 한국미술연구소 등이 있는 추정가 60억원가량의 복합 건물. 갤러리로 사용되던 2층에는 텅빈 박스만이 가득했다. 건물 관리인은 "이곳에는 이제 그림이 없고, 이벤트 물품만 있다"고 말했다.

재국씨의 미술 사업이 시작된 한국미술연구소에 갔다. 굳게 닫힌 철문 틈으로 수장고의 위치를 물었지만 연구소 직원은 "우리는 말할 게 없다"며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재국 수상한 소포박스 보니…
'호화 골프장' 회원

재국씨가 SK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핀크스 골프클럽' 회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기자는 지난 6월26일 서울 평창동 시공아트스페이스 인근에 놓여있던 뜯어진 소포박스를 발견, '핀크스 골프클럽'이 재국씨 앞으로 발송한 우편물을 확인했다. 텅빈 박스 오른쪽 하단에는 '전재국 회원님 귀하'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즉 재국씨가 해당 골프장의 회원권을 갖고 있다는 얘기.

핀크스 골프클럽 측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고객 개인정보는 확인해 줄 수 없다"며 "통상 회원권은 2억∼3억원에 거래된다"고 밝혔다. 소포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핀크스 골프클럽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골프장으로 SK그룹 계열사인 ㈜SK핀크스가 소유하고 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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