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인면수심' 목사님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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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인면수심' 목사님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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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번씩이나… 천사가면 쓴 악마형제 번갈아 몹쓸짓

[일요시사=사회팀] 인천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천사 형제로 알려졌던 이씨 형제의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이들 형제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안면이 있던 지적장애 자매를 수년간 수십 차례에 걸쳐 성폭행했다. 형제 중 목사 안수를 받은 형은 "언니는 했는데 동생은 안했다"며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마저 부인하고 있다. 상담 치료를 받고 있는 피해자들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사실 그 사람 잘 오지도 않았어요.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했어요."

인천 중구 동인천역 앞 허름한 빌딩들이 늘어선 골목길에는 '사랑의 마을' 급식소가 있었다. 인근 상권이 쇠락하면서 근처에 있던 식당과 학원들이 모두 문을 닫은 그곳에는 몇몇 유흥주점 간판과 노래방 네온사인만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조악한 '사랑의 마을' 간판 밑에는 소형 봉고 트럭 2대가 주차돼 있었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눈에 비치는 운전석에는 십자가가 걸려있었다.

언론의 집중 조명
장관표창까지 받아

'사랑의 마을'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던 이모(54)씨는 '조명탄 목사'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언론에 선행으로 보도된 것만도 수십 차례. 보건복지부 장관 명의로 된 선행 표창까지 받았다.

과거 이씨는 인천에서 유명한 조직폭력배로 활동했다. 인천 최대조직인 G파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그는 그쪽 세계에서 '해결사'로 통했다.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건설업자들과 손잡고 힘없는 철거민을 두들겨 패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의 대가로 이씨는 유흥주점을 관리하며 빌딩 등의 부동산을 소유했다.

폭력 등 전과 14범으로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살았던 이씨는 지난 1996년 수감생활 도중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 목사를 만났다. 최 목사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의 마지막 영결예배를 집도했던 목사다. 최 목사는 김씨처럼 조폭 출신인 이씨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최 목사는 이씨를 수차례 면회하면서 신앙을 가지라고 조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999년. 이씨는 출소 후 자신 명의의 부동산 일부를 매각해 '사랑의 마을'이라는 무료급식소를 설립했다. 노숙인에게 밥을 나눠주는 일종의 교회 봉사를 시작한 것. 이씨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속죄의 길"이라며 '사랑의 전도사'를 자칭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을'을 시작한 지 14년이 지난 최근 이씨는 10대 지적 장애 여성 2명을 수년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천사라는 가면에 가려져 있던 그의 민낯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씨는 몇 년 전부터 '사랑의 마을'에 거의 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복수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언론 촬영이나 취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이씨가 '사랑의 마을'을 찾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부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달리 노인들에게 제공한 무료 급식 수준도 턱없이 낮았다. 급식을 만드는 일은 이씨의 손윗 처남이 혼자 도맡았는데 이마저도 무료급식소가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 몇몇 노인들은 쓸쓸한 발걸음을 되돌려야했다.

이씨의 한 지인은 "급식소를 자주 찾는 분들 중에서는 할머니가 많으셨는데 혼자 식당을 운영해서 그런지 식단을 보면 대충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지인은 "무료급식소가 있는 건물 임대료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이씨 명의로 된 후원 계좌가 알려진 것만 수백 개인데 그 돈을 모아 모두 어디로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과 14범 폭력조직 행동대장 출신 "감옥 들락날락"
99년 출소 후 무료급식소 운영…'노숙인 대부' 칭송

이씨는 지난 2005년께 인천예수중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씨와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랑의 마을' 관계자는 "이씨가 인천예수중심교회의 이초석 목사와의 인연으로 몇 해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인천예수중심교회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지만 지난해 8월 이 목사는 주일 설교 도중 이씨의 예명과 목사 직함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성폭행 사건이 불거지자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한 목사는 사건을 수사 중인 인천경찰서를 직접 찾았다. 그는 "내가 오래 전부터 이씨를 알고 지냈는데 돈 주고 목사직을 산 그런 놈은 목사가 아니다"고 말하는 등 이씨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토로했다.

이어 그는 "목사들한테 기부하라며 돈 뜯고 '다방 여자'들 엉덩이 때리며 희희덕대는 그놈 때문에 우리 교회가 지금 이렇게 먹칠을 당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목사라는 직함과 '사랑의 마을'이라는 단체를 교묘히 이용했다. 기업이나 교회, 각종 단체에 후원을 요구할 때면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뒤 '사랑의 마을'이 언급된 기사 스크랩 파일을 보여줬다. "이런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돈을 좀 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또 이씨는 인천시로부터 무료급식소 운영을 명목으로 한 해에만 6000여만원의 후원금을 챙겼다. 그러나 이씨는 늘 "상황이 어렵다"며 지인들에게 더 많은 후원을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받은 후원금은 결국 이씨 가족의 생활비로 쓰였다. 이 같은 사실을 몇몇 후원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 '사랑의 마을' 후원자 대표는 "더 드릴 말씀이 없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씨는 몇몇 크리스천 교사와의 친분으로 사립 중·고등학교 강연 활동도 벌였다. 10대 장애 여성 2명을 성폭행했던 시기에도 이씨는 꼬박꼬박 강연을 나가 어린 학생들을 만났다. 주로 자신이 회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강연이 끝난 날이면 자신의 옛 부하이자 '사랑의 마을' 운영을 돕고 있던 봉사자 A(39)씨를 만났다. A씨에게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딸 B(19)양과 C(17)양이 있었다. A씨 역시 지체장애(4급)를 갖고 있었다.

이씨는 출소 후 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A씨의 사정으로 각각 6살과 4살이던 B양과 C양이 고아원에 맡겨진 시점까지 이씨는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이씨가 수년간 성폭행한 사람은 바로 갓 중학생이 된 B양과 C양이었다.


사랑의 마을
성폭행 마을

인천경찰서 등 복수 관계자 증언을 종합하면 이씨는 부인 조모(40)씨와 결혼한 후 A씨의 집을 나와 신혼집을 차렸다. 그리고 이씨의 동생 이모(44)씨는 형이 나간 직후인 2006년부터 A씨의 집에 얹혀살았다.

형과 마찬가지로 전과 14범인 동생 이씨는 출소 후 특별한 직업 없이 인천 모처에 살고 있었다. 동생 이씨는 A씨가 개인 사정으로 B양과 C양을 책임질 수 없게 되자 이들을 고아원에서 빼내 몇 달간 돌봐줬다. 이 같은 인연 때문에 B양 자매는 어릴 적부터 동생 이씨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부인 조씨와 결혼까지 하고 목사로 이름을 날린 이씨에 비해 동생 이씨는 전처와 이혼한 후 가진 것이 없었다. 이들 형제가 소원해진 건 이런 사회·경제적인 차이에 기인한다고 한 지인은 귀띔했다.

돈이 필요했던 동생 이씨는 인천 동구에 있는 A씨의 집으로 들어가 A씨의 기초생활수급비를 노렸다. 고아원에서 살던 두 자매도 A씨의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동생 이씨와 A씨 가족의 비극적인 동거가 시작됐다.

A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비를 구청으로부터 매달 지원받고 있었다. A씨는 B양과 C양 앞으로 들어오는 장애수당도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모두 합하면 매달 100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그러나 A씨는 이 돈 대부분을 동생 이씨에게 강탈당하고 있었다.

기초생활수급비가 통장으로 찍히는 날이면 동생 이씨는 A씨를 닦달했다. 그리고 A씨 가족 생활비로 입금된 돈은 고스란히 현금으로 인출돼 동생 이씨 손아귀로 들어갔다. 동생 이씨는 A씨 가족의 생계비를 갈취하면서도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거듭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이니까 함께 살기 위해 그 돈을 자기가 갖고 있겠다는 이해하기 힘든 핑계였다. 이 같은 수법으로 A씨가 당한 피해액은 파악된 규모만 1800만원이 넘었다.

동생 이씨는 A씨가 제때 돈을 주지 않으면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흉기도 사용했다. 한 번은 동생 이씨가 휘두른 칼에 A씨가 등을 찔려 병원치료를 받았다. 무엇보다 동생 이씨는 늘 B양과 C양 앞에서 A씨를 때렸다. A씨에게는 모욕을 두 자매에게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계산이었다.

이처럼 지옥 같은 날이 계속되자 참다못한 A씨는 동생 이씨로부터 달아났다. 가출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생 이씨는 집요했다. 늘 A씨의 소재를 추적했고, A씨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리고 온갖 구실을 잡아 A씨를 때렸다. 때리고 나서는 항상 편지를 썼다. 편지 말미에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폭력의 도그마는 멈추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이씨 형제는 대외적으로 '천사' 행세를 하고 다녔다. 담당 구청은 A씨의 잦은 가출과 혈연관계가 없는 동생 이씨의 동거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 두 자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생 이씨와의 분가를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다. 담당 구청은 속만 태웠고 동생 이씨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돈 뺏으며
칼 휘둘러

2013년 1월. A씨는 다시 한 번 가출을 결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딸인 B양과 C양을 데리고 잠적했다. A씨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 경찰이 찾아간 A씨의 집에는 동생 이씨만이 있었다. 동생 이씨도 A씨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급한 순간에 한 통의 전화가 인근 경찰서로부터 걸려왔다. A씨가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A씨는 경범죄에 연루돼 경찰서에 있었다. 이 자리에서 A씨는 작심한 듯 가출이 잦았던 사정을 경찰 측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동생 이씨의 악행이 몇 년 만에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A씨의 두 딸도 동생 이씨의 폭행을 증언했다. 조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B양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삼촌이 저를…."

동생 이씨의 성폭행 사실이 그렇게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동생 이씨는 지난 2009년부터 지난달까지 A씨의 집에서 한 달에 2∼3번씩 모두 수십 차례에 걸쳐 B양 자매를 성폭행했다. 동생 이씨의 성폭행은 A씨가 집을 비운 사이 벌어졌다. 동생 이씨는 이들이 지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성폭행 사실을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삼촌이라 부르며 잘도 따랐는데…"
신세지던 집 두자녀 차례로 성폭행
후원금에 기초생활수급비까지 강탈

실제로 B양과 C양은 성폭행 사실을 수년간 숨겨왔다. 하지만 이들 자매는 성폭행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B양과 C양 자매의 입을 막았던 동생 이씨는 결국 경찰에 구속됐다. 그리고 닫혀있던 본인의 입을 열었다. "내 형도 집에 와서…."

지난 2009년 이씨는 함께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던 A씨가 자신의 딸들을 급식소에 데려오자 A씨에게 심부름을 시켜 A씨만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남아있던 B양 자매를 차례로 성폭행했다.

이씨의 성폭행은 그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자신의 동생이 살고 있는 A씨의 집을 찾아 또다시 B양 자매를 성폭행했다. 확인된 사례만 모두 6건. 이들 형제가 B양 자매를 성폭행한 횟수는 모두 36번이었다.

숨겨온 비밀
파렴치한 형제

나란히 구속된 형제에게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인천경찰서는 곧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는 방침이다. 인천경찰서 강력팀의 허석곤 수사관은 "이들 형제의 여죄 여부를 계속해서 밝힐 것"이라며 "이런 중범죄의 경우는 보강 수사를 더 해야 하는데 구속 기간이 짧은 것이 좀 아쉽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이씨가 폭력조직과의 유착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다"면서 "피해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은 없어야 하고 피의자가 형을 마치고 출소했을 때 추가적인 보복도 사전에 예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현석 기자<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피해 가족 상태는?

A씨 가족은 이씨 형제의 악행이 드러난 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성폭행 사실을 진술한 B양과 C양은 이씨 형제의 해코지가 두려워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현재 B양 자매는 구청의 지원 속에 병원과 연계된 다수의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이수 받고 있다. 신경안정제도 복용하고 있다.
B양 자매를 돕고 있는 구청 직원은 "아이들의 빠른 회복을 위해선 주위에서 아이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언론의 신중한 보도를 부탁했다. 아이들의 아버지 A씨는 "이젠 우리끼리 정말 잘 살고 싶다"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삶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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