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병기 '북파공작원'의 충격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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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병기 '북파공작원'의 충격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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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훈련소에서 "나는 짐승이었다"

[일요시사=사회팀]1억원. 북파공작원 김모(36)씨가 목숨을 내건 대가로 받아든 돈이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며 환청을 듣는 A씨. 17년 전 어느 날 김씨는 그곳에서 악마를 봤다.

간첩은 실재한다. 반공 포스터에 나오는 남파간첩 얘기가 아니다. 북파된 간첩은 2000년 이후에도 이북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이남에는 간첩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훈련소가 있었다. 이른바 '북파공작원'이라 불리는 이들은 강원도 고성과 속초 인근에서 ‘인간병기’로 다시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쳤다. 북파공작원 김씨는 그곳에서 함께 훈련받던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다. 국가라는 이름 앞에 김씨의 삶은 철저히 뭉개졌다.

동료들 줄줄이 사망

1997년 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김씨에게는 막막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하고 있던 김씨는 운명처럼 특수부대 모병관을 만났다. 거짓말같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모병관은 김씨에게 1억원을 약속했다. 50개월에 1억원은 기본, 플러스알파까지 제시했다. 특수부대에서 근무하는 대가로 거액을 담보하자 김씨의 마음이 흔들렸다. 모병관은 김씨에게 제대 후의 삶까지 약속했다. 병역을 무사히 마치면 "국가정보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써주겠다"는 매력적인 제안을 더했다.

같은 해 4월 김씨는 북파특수임무요원(HID요원)으로 춘천에 있는 모 훈련소에 입대했다. 김씨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훈련소에 모여 있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그곳에서 김씨는 24명의 동기들과 함께 입소식을 마쳤다. 지옥 같은 훈련 일정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기초 체력향상을 위해 전투복을 입고 매일 12km를 달렸다. 반복되는 구보에 열외는 없었다. 실핏줄이 터지도록 뛰고 또 뛰었다. 숨 돌릴 틈 없이 교관의 지시에 따라 특수무술을 연마했다. 실전에 대비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오전 일과가 시작되면 잠복호 구축, 인계선 돌파 등 침투와 관련된 훈련을 받았다. 침투 이후의 상황을 대비한 사격, 수류탄 투척, M18A1 클레이모어(크레모아) 폭파 훈련도 빼놓지 않았다. 공수훈련과 전술훈련도 그들의 몫이었다.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가혹한 구타가 이어졌다.

입소 한 달 뒤 과중된 훈련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김씨는 교관으로부터 "훈련을 똑바로 하지 못한다"며 얼굴 등을 폭행당했다. 김씨를 때리던 교관은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수 있는 오함마(대형 망치)를 김씨에게 휘둘렀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김씨는 이를 피했고, 옆에 있던 동기는 김씨가 피한 오함마에 찍혀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김씨가 보는 앞에서 어디론가 끌려 나갔다.

다음날 아무일 없다는 듯 훈련은 다시 반복됐다. 하지만 김씨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동기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평생 씨름해야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김씨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100일간의 훈련소 일정이 끝났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김씨 앞에는 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7년 7월, 부대에 배치된 김씨는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야구방망이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김씨의 선배들은 군기확립을 위해서라며 야구방망이로 매일같이 김씨 등을 서너 차례 때렸다. 후배들의 온몸에 피멍이 든 상황에서도 선배들은 침투, 첩보 및 요인납치를 위한 독도·모스부호 수신 훈련, 휴전선 침투 훈련, 투검 연습, 해상수영 등을 강행했다.

밤에는 학대가 계속됐다. 김씨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2∼3시간 동안 머리박기를 시킨 뒤 쓰러지면 온몸을 짓밟았다. 또 잠복호를 연습한다는 핑계로 구덩이를 파고 안에 들어가게 한 뒤 모스 신호를 입력하도록 했다. 그리고 송수신이 틀릴 때마다 구덩이에 물을 채워 넣었다. 모두가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혹행위가 계속되자 사람이 죽어나갔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어느 계곡으로 후배기수들이 불려나갔다. 일명 '빵빠레' 훈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디찬 얼음물에 입수한 김씨와 동료들. 3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에 걸린 김씨의 동료 중 한 명이 쇼크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영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부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김씨의 후배는 투검 연습 시 훈련용 표적 나무 옆에 묶였다. 그의 머리 위로 후배들이 던지는 단검이 날아들었다. 손만 삐끗해도 후배의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상황. 그러나 아무도 이를 말리지 못했다.

돈에 혹해 입대 "4년간 끔찍한 가혹훈련"
제대 후 정신병…유공자 거부당하자 소송

가혹행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목만 내놓고 후배를 땅에 파묻은 선배들은 그를 산속에 1주일 동안 방치했다. 막사로 돌아온 후배에게는 물고문이 반복됐다. 욕조가득 담은 물에 후배의 얼굴이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 후배는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사람을 짐승 다루듯 하는 부대"라고 김씨는 회고했다. 살아남은 김씨는 2001년 6월 중사로 만기 전역했다. 그러나 김씨에게는 입대 전 없던 버릇이 생겼다.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불안 증세를 보였던 것. 김씨의 병명은 정신분열증이었다.

전역 후 김씨는 "북으로 가"라는 환청에 시달렸다. 밤에는 잠들지 않고 TV와 가구를 이쪽저쪽으로 옮기며 일렬로 줄을 맞췄다. 신발장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으면 부모에게 "당장 짐을 싸서 북한으로 넘어가"라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 "국가정보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써주겠다"던 모병관은 자취를 감췄다. 김씨는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정신병원을 전전해야했다.

2005년 12월 김씨는 수원보훈지청을 상대로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냈다. 국가를 위해 일 하다가 상해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공무 중 상해로 인정되지 않았다. 2011년 12월 보훈청은 김씨에게 등급 기준 미달 판정을 내렸다.

매일 무차별 폭행

지난해 김씨는 법원에 재판을 청구했다.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결정취소 소송이었다. 1심을 맡은 수원지법 행정2단독은 최근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김씨와 동료들의 증언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 군복무 과정에서 있었던 가혹행위가 김씨의 정신질환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법원은 "입대 전까지 증세가 없었고, 견디기 힘들 정도의 정신적 충격을 받을 만한 사건을 겪은 점 등이 인정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선고 직후 김씨의 변호인은 "김씨처럼 음지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북파공작원들이 지금이라도 국가의 도움을 받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북파공작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가혹훈련이 낱낱이 드러난 그날, 참관석에 앉아있던 한 동료는 말없는 눈물을 훔쳤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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