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로 몰린’ 대학강사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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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린’ 대학강사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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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강의했다고…학생이 국정원에 신고

[일요시사=사회팀] 공안정국의 폐해, 끔찍한 망령이 대학가에도 나타났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강의를 듣던 학생이 담당 강사를 빨갱이라며 국가정보원에 신고한 사실이 알려졌다.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상아탑’은 옛말이 된 걸까.

경희대학교에서 마르크스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 유물론 등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던 임승수씨(저술가·38)는 지난 10일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접했다. 임씨는 올해부터 경희대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라는 강의를 진행 중이었다. 그는 “학교로부터 누군가 나를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황당하고 어이없다”
임씨와 경희대 측에 따르면 임씨를 신고한 학생은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내용 등을 적은 이메일을 학교 관계자 등에 보냈다. 그 내용을 보면 신고자는 임씨의 저서내용과 과거 민주노동당 간부 경력의 전력 등을 문제삼아 신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자본주의 및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며 국정원에 신고한 것.

지난 1학기부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한 임씨는 교양수업‘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를 진행해 왔다. 임씨의 이 강의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생위원회가 임씨를 찾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지난 학기에 개설했다. 30명 정원이 금세 찼고 청강 신청도 들어왔다. 수업을 들었던 A씨는 “강의를 통해 쉽게 자본론을 이해할 수 있었고, 반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는데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B씨도 “대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어떤 내용이든지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의 개설을 결정한 대학생위원회 관계자는 “신고자가 강사의 민주노동당 가입 이력과 이석기 의원 체포 등을 논하면서 신고했다고 들었다. 그런 것들이 진보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수업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 쓰이면, 대학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고한 학생은 내란음모로 구속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을 예시로 들면서, 임씨를 신고한 근거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등 임씨의 저작과 과거 민주노동당 간부를 지낸 경력을 지적했다.

임씨는 “누군가 나를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말을 학교 측으로부터 들었다. 신고한 학생은 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갖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에서 간부로 일한 전력을 문제삼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주위에 신고당한 사람이 또 있는 것으로 안다”며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임씨에 대한 신고자의 신원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이 대학의 1학년 학생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임씨는 “황당하고 어이없다”며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어린 학생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게 요즘 이상한 사회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참 세상 요지경이다. 누가 그런 철없는 신고를 했는지도 궁금하고, 그런 신고를 받고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하다”고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과거 트위터에서 한 농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재판을 받은 사진사 박정근씨(25)를 변호한 이광철 변호사는 “트위터 농담은 물론 생각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다”며 “대학 강사를 신고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주눅들어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최은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도 “다양한 생각이 공
존해야 민주주의인데, 공안당국이 ‘생각이 다르면 적’이라는 배제의 논리를 확산시켰다”고 말했다.

“반자본주의·반미주의 강조”청강생이 고발
‘이석기 사건’이후 대학까지 덮친 공안정국

생각이 다른 견해의 표출을 차단하려는 행위는 최근 곳곳에서 발견됐다. 고려대 정경대·이과대 학생회와 참여연대가 공동 주최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관련 강연회’는 학교 측의 장소 대관 거부로 이날 야외 광장에서 열렸다.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일부 단체의 항의와 시위”로 배급사가 개봉 사흘 만에 상영을 중단하는 영화사상 초유의 조치를 내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매카시즘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사회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르크스 강의 및 관련 저서, 그리고 민주노동당 경력을 문제로 국정원에 신고당한 임씨는 2006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에서 교육부장을 맡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참여당과 합당하면서 통합진보당으로 바뀔 때 그에 반대하여 탈당했고 현재 당적이 없는 상태다.

임씨는 “민주노동당은 선거에 나왔고 국회의원도 배출했던 정당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당 경력이 국정원 신고거리가 된다는 건, 대체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밝혔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앞으로 수업할 때 ‘제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고요, 제가 거기에 동의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라고 꼭 얘기하려고 한다”며 “정말로 국정원이 도청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임씨는 국정원에 신고를 했다는 전화를 받은 후, 강의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이 수업은 여러분이 내 강의를 듣고 마르크스 사상에 세뇌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현상, 사건을 특정한 측면에서만 보면 항상 같은 부분이 보일 뿐입니다. 이 수업은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관점,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함께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보면, 자유시장경제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물이나 현상, 사건을 다양한 관점과 시각에서 볼 수 있을 때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지요. 이 수업이 여러분에게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라면 최소한 ‘말’과 ‘글’, 즉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과열된 이념 갈등이 수십년간 대학에서 이뤄진 강의까지 흔들고 있다. 특정 표현으로 체포나 구속이 되는 건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이것을 그대로 용인한다면 힘들게 획득한 민주주의가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보법 위반자 보니…
지난 13일 경찰청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가보안법 위반자 검거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올해 8월말까지 최근 5년간 총 55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됐다.
2009년 70명이었던 국보법 위반 혐의 검거자는 2010년 151명, 2011년 135명,2012년 109명이었다. 올해는 8개월 만에 98명이 적발됐다. 찬양고무 346명, 이적단체구성가입 134명, 회합통신 39명, 잠입탈출 17명, 간첩 10명, 반국가단체 구성가입 3명, 편의제공 3명, 목적수행 약취유인 2명, 자진지원 2명, 예비음모 2명으로 집계됐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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