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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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신청

일요시사 0 2701 0 0
 “나 말이야, 이 편지만큼은 번듯하게 남자들 말투로 쓰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이상하구나. 부끄러워서 도무지 써지지가 않는다. 난 이렇게 오래도록 여자로 지냈는데도, 아직 어딘가에 남자인 자신이, 원래의 자신이 남아 있나봐. 아버지 역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 심신이 여자, 명실상부한 엄마야. 우습구나. 난 내 인생을 사랑하고 있다. 남자였던 과거도, 네 엄마랑 결혼했던 일도, 여자로 살아온 세월도, 너를 키워 성장시킨 것도….”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에는 부인을 잃고 여자의 삶을 살고 있는 유부남 에리코가 등장한다. 여자가 된 그는 재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홀로 키우며 살아간다. 만약 이런 남자가 법원에 성별을 바꿔달라고 하면 어떤 판결이 나올까.



아빠에서 엄마 되려던 30대, 자녀 때문에…좌절
대법 “기혼·자녀 있는 성전환자, 성별정정 불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남자로 태어나 결혼을 했고, 이혼 후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정모(38)씨가 가족관계등록부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한 것. 

그러나 지난 9월 2일 대법원은 “미성년 자녀에게 정신적 혼란과 충격, 부정적 영향을 준다”며 성별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녀가 성인이 되면 정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법은 성전환자의 인권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남녀 결혼과 자녀 양육의 관습도 계속 보호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내가 바란 '몸'

정씨는 1973년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창시절부터 여성복을 즐겨 입고 여성을 동성으로 여기는 등 심한 성정체성 장애를 겪어왔다. 그러던 그는 수차례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다 부모님의 끈질긴 권유로 19세가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2년 후인 1994년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뒀지만 그의 성정체성 장애는 계속됐고,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됐다. 그러던 중 32세에 태국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았고, 그 후로 계속해서 여성호르몬제를 투약해 오며 사실상 여성의 몸으로 살아왔다.

이에 정씨는 2008년 울산지방법원에 등록부상 성별을 고쳐달라는 신청을 냈지만, 법원은 이를 불허했다. 이후 2심도 1심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단, 정씨의 항고를 기각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정씨가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을 정정해 달라며 낸 성별정정신청을 기각한 원심 결정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성전환수술에 의하여 출생시의 성과 다른 반대의 성으로 성전환은 이미 이루어 졌고, 정신과 등 의학적 측면에서도 이미 그 전환된 성으로 인식되고 있다면 전환된 성으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활동을 하는 데에까지 법이 관여할 방법은 없다”면서도 “그러나 성전환자가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성별을 정정하여, 그 배우자나 미성년자인 자녀의 법적 지위와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곤란을 초래하는 것까지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성전환자에게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음에도 성별정정을 허용한다면 미성년자인 자녀의 입장에서는 법률적인 평가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또는 어머니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뒤바뀌는 상황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한다”며 “이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충격에 노출될 수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는 동성혼의 외관이 현출될 수밖에 없는데 성별정정을 허용하게 되면 가족관계증명서의 부(父)란에 기재된 사람의 성별이 여(女)로 또는 모(母)란에 기재된 사람의 성별이 남(男)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몸'

재판부는 “미성년자인 자녀는 취학 등을 위해 가족관계증명서가 요구될 때마다 동성혼의 외관이 현출된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동성혼에 대한 찬반양론을 떠나 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은 엄연한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적응능력이 성숙되지 아니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미성년자인 자녀를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노출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친권자로서 또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를 도외시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대법원은 혼인 중인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현재 미국 텍사스를 비롯해 4개 주에선 공식 기록의 남녀 성별 정정을 허용하지 않고 있고, 영국에선 혼인 중에 성별을 고치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된다. 스웨덴·오스트리아·뉴질랜드도 혼인 중에는 성별을 고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재판부는 “현행 민법 규정과 오늘날의 사회통념상 현재 혼인 중에 있는 성전환자는 전환된 성을 법률적으로 그 사람의 성이라고 평가할 수 없고 그 결과 가족관계등록부의 성별정정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반면 박시환·김지형·전수안 대법관은 “다수의견은 사회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없어야만 정정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라며 “성전환자에 대한 다수의 인식을 궁극적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이며, 소수자인 성전환자도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와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기본권을 외면하는 것이어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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