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2011 이슈메이커 50인②재계 1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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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기획]<일요시사 선정> 2011 이슈메이커 50인②재계 1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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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송응철 기자] 2011년 한해가 저물었다. 늘 그랬듯 재계 역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나 꼭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각종 비리와 의혹 사이로 마음이 따듯해지는 감동도 전해졌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의문이 있는가 하면 가슴 먹먹한 사연도 있었다. 그야말로 ‘희노애락’이 한데 버무려진 한해였다. 지난 2011년 한해 신문지면을 수놓은 사건과 이슈들을 재계를 호령하는 총수들을 중심으로 풀어봤다.

최태원, 정몽구 '통 큰 기부'…이건희, 발로 뛰어
이윤재, 담철곤 '철창'…허창수, 재계서 죄인 취급

<5000억원 통 큰 기부 정몽구>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올해 재계 대표급 ‘좋은 회장님’에 등극했다. 지난 8월28일 5000억원 상당의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그룹 사회공헌재단인 해비치 재단에 출연한 것을 두고서다. 기부액은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사용된다.

사방에서 갈채가 쏟아졌다. 정 회장의 기부가 이처럼 환영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국내 재벌들의 기부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연말연시나 재난 때 적지 않은 돈을 내놨지만 대부분 기업 차원의 기부였다. 게다가 이마저도 ‘보여주기’나 ‘생색내기’용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당연히 돋보일 수밖에 없다.

개인 기부 규모로 사상 최대 액수라는 점 외에도 정 회장의 기부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 재계의 기부문화에 변화를 이끌어 내리란 기대감이 바로 그것이다. 정 회장은 올해 우리 기부문화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핸드볼인 염원 이뤄준 최태원>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통 큰 기부’에 동참했다. 현금이나 주식을 내놓은 건 아니다. 최 회장은 핸드볼 전용 경기장을 준공해 기부키로 했다. SK그룹은 스포츠 분야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설계·공사비 434억원을 핸드볼협회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전액 부담했다. 국내 기업이 대규모 국민 스포츠 시설을 조성해 사회에 기부한 첫 사례다.

최 회장이 이 같은 결단을 내린 건 전용경기장을 갖는 게 핸드볼인들의 오랜 염원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다. 국내 최고 수준으로 지어달라는 최 회장의 당부에 경기장 내 관람석?전광판?음향설비 등에 최상급 기술과 자재가 투입됐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의 기부가 더욱 빛을 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울산대공원과 세종시 장례문화센터를 조성 및 기부하는가 하면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2009년부터 5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 ‘행복한 학교’ 등 사회적 책임에 앞장서고 있다. 최 회장의 사회적 기여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공공시설 조성 부문만 2000억원대에 달한다. 여기에 사회적기업 지원 기금을 더하면 규모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주역 이건희>

재계 맏형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몸으로 직접 뛰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지난 2월 평창을 찾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 접견을 시작으로 영국 런던 ‘스포츠 어코드’, 스위스 로잔 ‘IOC 테크니컬 브리핑’,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 등 유치전의 핵심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1년반 동안 해외 출장을 170일이나 다녔다. 이동거리는 모두 21만㎞, 지구 5바퀴가 넘는 거리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글로벌 그룹의 회장이라는 자존심도 내려놨다. IOC 위원 자격으로 동료위원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는가 하면 선약이 있는 IOC 위원을 만나기 위해 1시간30분이나 기다리기도 했다.

각고에 노력 끝에 지난 7월6일 평창이 개최지로 선정됐다. 이날 이 회장은 소리 없이 울먹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2003년, 2007년 두 번 연속 결선투표에서 평창이 탈락했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

<청부폭행 혐의 철창행 이윤재>

좋은 일에 앞장선 ‘착한 회장님’ 들이 있는가하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못된 회장님’도 있다. 그 선두에 있는 건 단연 이윤재 전 피죤 회장. 직원 폭행, 회삿돈 횡령, 청부폭행 등 온갖 더러운 일이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문제는 지난 6월 이은욱 전 피죤 사장을 취임 4개월 만에 해고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사장을 통해 창업자 일가의 전횡이 세상에 알려진 것. 여기에 피죤 전 직원들의 제보도 잇따랐다. 다급해진 이 전 회장은 측근에게 3억원을 건네며 이 전 사장 등의 입막음을 주문했다. 김 이사는 청부폭행을 지시했고 결국 경찰에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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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회장은 재판 과정에서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이 전 사장 등 전 임직원들을 상대로 한 모든 소송도 취하했다. 이 전 회장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며 거듭 선처를 부탁했다. 법원은 이 전 회장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의 반성은 진심이 아니었다. 선고에 앞서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이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 사임 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사내이사로 취임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또 후임 대표에 이 전 회장의 딸인 이주연 부회장이 선임됐다. 결국 이 전 회장의 반성은 형량을 낮추기 위한 ‘꼼수’였던 셈이다.

<비자금 혐의 쇠고랑 담철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도 쇠고랑을 찼다. 3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다. 검찰에 따르면 담 회장은 해외 유명작가의 고가 미술품들을 계열사 법인자금 140억원으로 매입해 서울 성북동 자택에 설치했다. 담 회장은 회삿돈으로 고가의 외제 고급 슈퍼카도 굴렸다. 담 회장이 ‘공짜’로 몰고 다녔던 차량들의 가격은 웬만한 집 한 채보다 비싸다. 담 회장은 회삿돈으로 자택에 관리자 8명을 두고 ‘황제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검찰은 담 회장에게 징역 3년6개월을 구형했다. 담 회장 측은 실형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우선 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해 방어에 나섰다. 재계와 법조계에선 역대 최강의 ‘드림팀’이 모였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영장 청구 직전 문제가 된 돈도 변제했다. 담 회장은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검찰 측에서 횡령·배임 혐의를 적용한 회삿돈 160억원을 개인 재산으로 전액 갚았다. 이어 경영인으로서 ‘담철곤 업적’을 강조했다. 변호인단은 공판 때마다 해외시장 진출 등의 담 회장 공로를 부각시켰다. 담 회장은 이처럼 ‘아등바등’ 했지만 3년형을 선고받으면서 결국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죄인된 양 비난받는 허창수>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딱히 죄를 짓진 않았다. 그러나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비난을 받고 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할 일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허 회장은 지난 2월 전경련 33대 회장에 올랐다. 당시 ▲초과이익공유제 추진 ▲기업별 동반성장지수 발표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법인세 감세 철회 움직임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등 재계에 대한 정치권 압박이 거세지던 때였다. 그러나 정작 대기업 입장을 대변해야 할 전경련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기업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갔다.

재계와 정치권 사이에 암운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허 회장이 ‘마이크’를 든 것은 지난 6월 취임 후 처음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다. 허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정치권을 향해 노골적인 반기를 들었다. 재계는 전체적으로 허 회장의 쓴소리를 반색했다. 오랜만에 대기업들의 입장을 시원하게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도 잠시. 허 회장을 여의도로 호출하는 등 발끈한 정치권이 잔뜩 벼르자 전경련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심지어 정부·정치권과 보조를 맞추거나 눈치를 보는 기류마저 감지됐다. 이후 지금까지도 허 회장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재계에선 허 회장이 그동안 쌓아온 전경련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비난이 나오고 있다.

<정계 로비 폭로한 이국철>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회장님’도 있다. 정계 로비를 폭로하며 정계의 핵으로 떠오른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회장의 ‘폭로’가 시작된 건 지난 10월. 첫 번째 폭로 대상은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었다. 이후 폭로 대상은 늘어났다. 이 회장은 이명박 정권에서 ‘왕차관’으로 불리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이 접대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회장이 공개한 ‘비망록’에는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과의 만남, 대검 고위 관계자 등에게 5억 원을 현금으로 전달한 일 등이 나와 있다. 비망록은 이 회장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검증과 사실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폭로의 목적이다. 이 회장은 신 차관과 인간적으로는 둘이 형 동생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회장은 신 차관을 사회적으로 살인했다. 상식적으론 생각하기 힘든 모순이다. 이를 두고 여러 설들이 오가고 있지만 아직 폭로의 목적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 선종구>

선종구 하이마트 회장은 돌연 하이마트를 매각키로 결정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선 회장과 유진그룹은 지난 11월 경영권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러던 지난 11월30일 하이마트 주주총회 직전 극적인 화해를 했다. 이날 주총에선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이 재무 총괄을, 선 회장이 영업 총괄을 맡는 각자대표 체제를 의결했다.

모든 것은 수습된 듯 보였다. 갈등의 핵심이던 유경선 회장의 이사 선임 문제가 해결됐고, 경영진과 대주주간 갈등으로 기업 가치 훼손을 우려하던 시장은 주가 반등으로 화답했다. 그러던 지난 12월1일 선 회장은 돌연 재매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은 경악했다.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를 놓고 입장 정리에 고심했던 기관투자자들은 불쾌한 반응 일색이다. 이들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투자자들도 초대형 매물폭탄을 꼼수로 막았다며 분개하는 모습이다. 1, 2대 주주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비난도 쏟아져 나왔다. 선 회장은 표면적으론 ‘비전 있는 주주를 찾기 위해서’라는 매각 사유를 밝혔지만 그 진짜 속내는 안개에 가려있다.

<골치 아프면 한국 뜨는 조남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도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의 처세를 두고서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지난해 12월15일 사측이 노조에게 400명의 정리해고자 명단을 통보하면서 본격화 됐다. 이후 노사는 한치의 물러섬 없이 대립각을 세웠다. 갈등은 고조됐고 사태는 여야 정치권까지 확대됐다.
그 동안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조 회장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청문회 요구를 받은 직후인 지난 6월17일 도망치듯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약속한 날짜에 귀국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사측도 조 회장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했다. 출장을 핑계로 댔지만 도피성 외유라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었다.

복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자 지난 8월10일 조 회장이 돌아왔다. 출장길에 오른 지 54일 만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한진중공업 사태와 관련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도 정리해고 원칙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8월18일 열린 청문회는 그야말로 ‘조남호 난타전’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구조조정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을 지켰다. 이처럼 완고한 의지를 지켜오던 그는 지난 11월9일 돌연 한진중고업 노사가 94명의 해고자를 재고용하는데 합의했다. 끝까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회장님이다.

<쇳물처럼 뜨겁게 살다 간 박태준>

국민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회장님도 있었다.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1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10년 전 수술했던 흉막섬유종 후유증으로 흉막 전폐절제술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박 명예회장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죽기 살기’로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세웠다. 무리수라는 비난에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런 그의 무쇠 같던 육체와 집념도 결국 죽음을 비켜가지 못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 명예회장은 청렴한 생활로 유명하다.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았다.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해야 제대로 된 조직운영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의 명의로 남은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최근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큰딸의 집에서 지냈으며 입원비조차 본인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박 명예회장은 이처럼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근현대사와 국민들의 가슴속에 남긴 족적만큼은 무엇보다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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