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뒤흔든 '희대의 탈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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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뒤흔든 '희대의 탈옥' 이야기

일요시사 0 1628 0 0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련이 없음


영화보다 더한 현실판 프리즌 브레이크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있던 전과 25범의 피의자가 탈옥했다.

탈옥얘기를 다룬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의 치밀한 계획도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온몸에 교도소 설계도를 문신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경찰관이 조는 틈을 타 한 뼘 높이의 배식 구멍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역대 간 큰 탈옥수들을 살펴봤다.

미꾸라지처럼 구멍을 빠져나간 황당 탈옥사건이 발생했다. 전과 25범인 최갑복(50)은 지난 17일 온 몸에 피부연고를 발라 최대한 매끄럽게 만든 뒤 가로 45cm, 세로 16cm의 직사각형 배식구를 통해 도망쳤다. 유치장을 빠져나가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성폭행과 강도 등 각종 전과를 갖고 있는 최갑복은 탈주 6일만에 밀양서 검거됐다. 

탈옥 후 브라질서
부인과 살 계획

최갑복의 ‘배식구 탈출’이 최근화제라면 80년대는 조세형(당시39세)의 ‘대낮 대탈주’가 있었다. 전과 11범이던 그는 83년 4월 14일 TV 드라마 속의 죄수처럼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이날 서울 서소문에 있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다가 구치소로 넘겨지기 직전 대기 중인 구치감에서 일을 벌였다. 순식간에 수갑과 포승을 푼 뒤 복도 벽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도주했다. 그 뒤 건물 옥상과 옥상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조세형은 상습절도범이었다. 1983년 검거 이전에도 절도죄만으로 6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모도 누군지 모른 채 길거리에서 자라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던 그였다.

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감호까지 청구돼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론의 동정과 은근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조세형은 고관대작의 집만 골라 털어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는 주로 고위공직자, 기업체 사장 등 부유한 집만을 골라 귀금속과 금품을 훔쳐왔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도’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마치 의적처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우리 사회의 빈부갈등에 따른 위태로운 위화감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조세형의 절도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부유층 대저택만 노렸고, 사람을 해치는 강도짓은 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게 한 적 없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또 도둑질로 생긴 돈의 40%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대도’ 조세형 대낮 대탈주, 구치감 환풍기 뚫고
전주교도소 탈옥3명, 쇠창살 자르고 담벼락 넘어

탈주 후에도 조씨의 절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5박6일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서울 도심을 활보하며 5차례에 걸쳐 주택에 침입해 음식과 현금 등을 훔쳤다.

그러나 이도 잠시. 끈질긴 추적을 벌인 경찰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붙잡혔다. 다행히 살았다. 이후 진행된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무기징역이 구형된 데다 보호감호 10년까지 청구돼 15~20년간을 복역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이가 60이 가까워지므로 부인 나영씨와의 결혼생활이 지켜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탈주 결심 동기를 밝혔다. 그는 탈출 후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한 뒤 홍콩에 있는 부인을 불러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세형은 특수절도에 도주 혐의까지 추가돼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재심청구 등을 통해 16년만인 1998년 출소했다.

출감하자마자 그는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겠다”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자신을 검거했던 ‘수사반장’ 최중락씨의 도움으로 에스원 범죄예방 자문위원으로 위촉, ‘범죄예방 전도사’로 새 길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음식 구걸 후
최후의 순간

90년대 발생한 또 다른 탈주사건이다. 노태우 정권이 서슬퍼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던 때였다. 조세형처럼 구치감의 환풍기 구멍을 뜯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었다.

1990년 2월 27일 새벽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박봉선(당시30세), 신광재(당시21세), 김모군(당시17세) 등 3명은 감방 창문에 설치된 철책 2개를 쇠톱으로 자르고 사물함으로 쓰이는 선반으로 2.7m짜리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그 뒤 경찰의 검문을 받다가 실탄 6발이 장전된 권총까지 빼앗았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살인범이었다. 박봉선은 무기징역을, 신광재는 징역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비해 함께 탈주했던 김군은 폭력 초범이었다. 1년만 형을 살면 나오게 돼 있었다.

이들의 도주행각은 이틀 만에 대전에서 경찰 감시망에 걸린다. 이후 경찰포위망이 좁혀오자 이들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대청호 안으로 숨어든다. 경찰은 뒤 쫓아가며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박봉선은 권총을 겨누며 “먹을 것을 보내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고, 경찰이 “한 명을 보내주면 갈전으로 함께 나가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김군을 대신 보냈다. 경찰은 김군을 곧바로 고무보트에 태워 연행했다.

경찰헬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다”는 방송이 잇달아 나왔다. 경찰이 접근해오자 박봉선이 머리에 권총1발을 발사해 자살했으며 신광재 역시 권총을 주워 왼쪽가슴에 쏘았다. 박봉선은 현장에서 숨지고 신광재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전주교도소 탈옥극’의 전모는 영구 미스터리로 남았다. 경찰에 잡힌 김군은 단순공범이라 아는 게 없었다. 직경 2cm나 되는 쇠창살을 어떻게 잘랐는가 하는 의문도 풀리지 않았다.

수시로 감방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이 작업을 완성하려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데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탈옥 욕망’으로
초인적 다이어트

1997년 1월 20일엔 희대의 탈옥수가 탄생한다. 그 이름은 신창원(당시30세). 그는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 통풍구 철망을 뜯고 사동 밖으로 나온 뒤 교도소 내 공사장을 통해 밖으로 달아났다.

신창원은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범죄자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82년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처음 들어갔다.

이후 절도 등으로 3번 더 교도소를 들락거렸던 그는 89년 3월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성북구 돈암동 정모씨 집에 침입, 정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해 6개월여 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89년 9월 검거된 그는 강도치사죄로 무기형이 확정됐다. 당시 그는 이 형에 몹시도 분노했다고 한다. 자신의 범죄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형을 받았다는 것.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 역대 최장 탈옥기간 달성    
영원한 해방을 꿈꾸던 탈옥수들의 비참한 말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신창원은 허구헌날 싸움질에 사고를 연발하다가 이감을 거듭하던 중 부산교도소에 온 이후 거짓말처럼 사람이 변했다. 모범수가 됐고, 운동도 열심히 하여 몸을 가꾸는 건실한 수감자로 생활했다.

원래 80kg이 넘던 그가 60kg의 날렵한 체구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의 초인적인 다이어트 동기는 따로 있었다. 교도소 내 교회 공사를 위해 교도소 외벽 일부가 철거되고 철제 울타리로 대체된 뒤였고, 화장실 환풍구의 쇠창살이 허술하게 보였던 것이 이유였다. 그는 몰래 손에 넣은 쇠톱으로 쇠창살을 조금씩 잘랐고 몰라보게 날씬해진 몸으로 그 사이를 통과했다.

최장기간 탈옥수 신창원
▲최장기간 탈옥수 신창원

탈옥 후 신창원은 도주하는 동안 모두 5차례에 걸쳐 경찰과 맞닥뜨리고도 유유히 검거망을 벗어나며 2년6개월여 동안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1999년 7월 검거되기 전까지 그는 절도 104건, 강도 5건, 강도강간 1건 등 총 142건에 달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검거 후 22년 6월의 형이 추가됐다.

이처럼 범죄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일들이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교도소에서도 간간히 발생했다. 절도를 저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등의 죗값을 치르는 길 대신 감옥을 뛰쳐나와 야수처럼 날뛴 탈옥수들.

시작은 요란
그 끝은 ‘처참’

출소이후 ‘절도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것 같았던 대도 조세형은 제버릇 남 못주는 절도행각으로 ‘좀도둑’신세로 전락했고, 독 안에 갇혀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박봉선과 신광재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는지, 교도소에서 어떤 처지였는지, 어떻게 탈옥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역대 탈옥수 중에서 최장 탈옥기간 기록을 달성한 신창원은 체포된 이후 특급의 감시를 받는 죄수로 10년이 넘도록 독방 생활을 했다. 답답함을 못 이기던 그는 지난해 자살 기도까지 했다.

인과응보일까. 사회적 책임일까. 어쨌든 영원한 해방을 꿈꿨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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