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에 재조사' 형제복지원 사건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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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만에 재조사' 형제복지원 사건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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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명씩 죽어나가…시체도 팔았다


[일요시사=사회팀] 박근혜정부가 부산 지역 최대의 인권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진상규명에 나설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난 12일 안전행정부 등 유관기관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와 실무대책회의를 열고 부처 간 의견을 조율했다. 무려 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3000여명에 달하는 피해자를 낳았던 역사적 비극은 27년이 지난 오늘에야 다시 빛을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행색이 초라하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는 물론 살해와 암매장까지 당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것도 '제2의 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씨가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에 있던 원생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형제복지원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개·돼지처럼…


관련한 서적 및 언론보도 등을 종합한 사건 개요는 이렇다. 부산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형제복지원은 보육시설로 설립된 뒤 1971년 12월 부랑인 보호시설로 바뀌었다.

당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은 거리의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민간이 만든 수용소에 가두도록 정책을 폈다.

1975년 12월 내무부(안전행정부 전신)는 '부랑인의 신고·단속·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을 훈령으로 제정했다. 해당 훈령에 따라 부랑인 보호시설에는 정보 보조금이 지급됐다.

이때부터 형제복지원은 보조금을 더 타내기 위해 부랑인을 닥치는 대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2년간 형제복지원은 모집한 부랑인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키며 원생들에게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란 책에는 그날의 기억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1984년 겨우 9살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복지원에 수용된 그는 그곳에서 지옥을 목도했다. 일상화된 구타와 고문, 기합 등은 어린 한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한씨의 누나는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분열증을 얻었다. 한씨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한씨의 가족처럼 멀쩡한 상태로 잡혀와 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를 얻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한씨는 추리닝 한 벌과 고무신을 지급받고 거의 매일 같이 일했다고 했다. 날이 더운 건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몸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는 3000여명의 원생을 사지로 내몰았다. 모든 원생들의 손과 발이 퉁퉁 부어 동상이 걸리는 날이면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고된 노역에도 사료나 다를 바 없는 식사가 제공됐다. 썩은 젓갈과 깍두기가 반찬의 전부였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이들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돌았다고 했다.


부랑인들 모아 감금하고 강제 노역
사망 500명 등 3000여명 피해 집계
폭행고문에 성폭행…진상규명 착수


육군 부사관 출신인 박인근씨는 자신의 복지원을 악독한 군대로 만들었다. 중대장부터 소대원까지 계급을 매기고 상급자는 하급자를 연일 구타했다. 마땅한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폭행을 당한 일부 소대원(원생)은 정신을 잃고 하얀 천에 덮여 실려 나갔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 사망한 원생은 모두 531명, 일부 시신은 유명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갔다. 시신 한 구당 가격은 300만∼500만원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복지원의 실상은 참혹했다. 하지만 박인근씨는 국고보조금을 꼬박꼬박 챙겼다. 돈맛을 본 박인근씨는 어른이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잡아들였다. 앵벌이를 하던 아이도 쪽잠을 자던 어른도 복지원에 끌려왔다. 전두환정부는 박인근씨에게 모두 2차례에 걸쳐 훈장을 수여했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정부는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섰다. 부산역에서 홀로 TV를 보고 있던 소년은 부랑인이 아닌데 경찰에 붙잡혔다가 박인근씨가 보낸 차에 실려 복지원에 끌려갔다. 이후 소년은 '청소가 안 됐다' '복장이 불량하다' '친구와 떠든다'는 등의 이유로 매일 얻어맞았다. 이 소년의 이름은 오준구씨다.


이런 피해자는 오씨뿐만이 아니다.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바람 쐬러 나온 여성,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 농촌에서 온 일용직 노동자 모두 불법감금의 피해자가 됐다. 이들은 부산 경찰에 의해 구금된 후 차례로 '지옥'에 끌려갔다. 경찰은 실적을 올려 좋고, 복지원은 사람 수대로 보조금이 나와 좋았다. 이렇게 타낸 형제복지원의 연간 보조금은 20억원에 달했다.

박인근씨는 이 돈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썼다. 본인 명의로 된 부지에 운전교습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는가 하면 군대처럼 천막생활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강요했다. 이들은 흑벽돌을 나르다 벽돌이 깨지면 곡괭이에 찍혀 생사를 오갔다.

학대를 견디다 못한 몇몇 원생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교’에게 적발되어 죽임을 당했다. 시체는 아무도 모르게 인근 야산에 매장됐다.

1987년 1월 당시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그해 1월16일 형제복지원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앞서 김 검사는 박인근씨 소유 울주군 농장에서 노역하는 원생들을 목격하면서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시무시한 철문을 뚫고 원장실에 도착하자 금고에서는 뭉칫돈이 쏟아졌다.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 등은 시가 20억원 규모였다. 김 검사는 국고보조금 39억원 중 11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박인근씨를 구속했다. 같은 해 형제복지원은 폐쇄됐다.


잘 사는 원장


그러나 복지원에 남아있던 원생 2000여명은 또다시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피해 보상이나 재활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무방비로 사회에 노출됐다. 그리고 유관기관은 형제복지원의 입소 자료를 신속히 파기하며 원생들의 인권유린 사실을 은폐했다.

김 검사는 지난 1993년 쓴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수사 외압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구형이 20년에서 15년으로 줄어든 것. 뿐만 아니라 재판부는 징역 10년(1심)에서 4년(2심)으로 다시 2년6월(대법 파기환송심)로 형을 감경했다.

6억원이 부과됐던 벌금은 2심부터 자취를 감췄다. 현재 형제복지원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형제복지원의 비극 역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27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 남은 건 '악마를 보았던' 기억뿐이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 형제복지원 원장은?
본인 재산만 무려 '1000억원'


재판 후 2년여 만에 출소한 박인근씨는 형제복지원 법인의 이름을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바꿨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에 새로운 시설을 세운 박인근씨는 지난 2011년까지 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 재단은 3남인 박천광씨가 물려받았다. 또 박씨는 지난 2008년 대안학교인 신영중·고교의 대표이사가 된 뒤 2010년 첫째 딸에게 학교를 넘겼다. 일각에선 박인근 일가의 재산을 1000억원대로 추정하고 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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