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만에 간첩누명 벗은 중년남성 이야기

한국뉴스


 

24년 만에 간첩누명 벗은 중년남성 이야기

일요시사 0 2140 0 0
몽둥이 타작에 짐승처럼 울부짖다 허위자백
아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억울한 진실 말할 것

간첩누명을 쓰고 24년을 외롭게 싸우다 서울고법 형사5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A(54)씨의 이야기다. 그는 혈기왕성했던 20대 때 돈을 벌기위해 몇 달간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몇 년 후, 돈 벌러 갔던 일본행이 A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지난 1986년 갑자기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수사관의 첫마디는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B씨의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한 혐의로 체포한다'였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43일간 구금됐다. 구금된 기간 동안 그는 온갖 구타와 고문,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43일의 모진고문

“오랫동안 간첩이 아니라고 버텼다. 하지만 몽둥이로 죽을 때 까지 맞으니까 더 이상 못 버티겠더라”라며 “어쩔 수없이 모두 허위자백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듬해 대법원에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의 형을 확정받았고 5년3개월간 수감됐다.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가장 걱정한 것은 생후 5개월 된 아들이었다. 그가 수감해 있던 기간 동안 아이가 아내에게 “아빠 어디 있어?”라고 물어보면 아내는 “아빠는 돈 벌러 일본에 갔다”라고 말하며 옥살이 사실을 숨겼다고 했다.

5개월 된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몇 년 후 아들과 재회한 곳은 대전교도소였다. “아이가 나를 처음보고 했던 말이 ‘아빠 굉장히 큰 집에 산다’ 였다”라며 “수감생활 동안 단 하루도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나 때문에 고통 받고 있을 아내와 아빠라고 제대로 불러보지 못하는 아들이 떠올라 하루하루가 비탄의 나날이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5년여의 형을 마친 그는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가정을 책임져야 했기에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기억을 뒤로하고 뭐든 열심히 해야 했다. 억울함 보단 생계가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5년 만에 나타난 아빠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아빠에게 다가가지 않고 주위만 빙빙 맴돌았다. 어렸을 때 나눠야 했던 정이 없었기에 부자 사이에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A씨는 아들과의 벽을 허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들과의 대화는 겉돌았고, 구속된 생활을 살았던 A씨 스스로도 자유로운 생활이 어색했다. 그런 중에도 경찰은 보안관찰을 이유로 수시로 찾아왔고, 아파트 경비원에게 A씨의 동향 등을 캐물었다. 이것을 바라봐야 했던 아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들 위해 결백주장

어쩔 수 없이 A씨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묻힐 뻔 했던 ‘자신이 간첩이었다’는 누명을 풀기 위해서 그는 동분서주 움직였다.

결국 진실화해위원회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2006년 위원회는 A씨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결국 3년여의 노력 끝에 A씨의 누명은 벗어날 조짐이 보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A씨는 일본에서 일한 회사가 조총련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음에도, 보안사는 42일간의 불법 구금과 고문 및 가혹행위로 구씨로부터 허위자백을 받아 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발표했다. A씨는 그로부터 1년 뒤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 형사5부(안영진 부장판사)는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한 혐의(국가보안법상 간첩)로 기소돼 징역 7년이 확정됐던 구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는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에 의해 연행돼 40여일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해 임의성 없는 자백을 했고, 신문에 참여한 적이 없는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 명의로 수사보고서가 작성되는 등 증거서류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A씨를 포섭했다는 B씨가 조총련 소속 북한공작원이라거나 A씨가 이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지난 18일 24년 만에 자신의 누명을 벗은 A씨는 어느덧 훌쩍 커 27살이 된 아들에게 “아빠는 억울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A씨는 “아들은 내가 5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라며 “내가 간첩혐의로 징역을 살았다는 걸 평생 모르고 살아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의 아팠던 과거가 아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결국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A씨는 끝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안기부 수사관들, 그들 못지않게 험악했던 검사들, 옷을 벗고 고문상처를 한 번 확인해달라는 호소를 오히려 나무라던 판사들 이름을 생생히 기억한다”며 “하지만 그들을 모두 용서하려 한다. 다만 국가가 저지른 반인권적 범죄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0 Comments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