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7); 마음에 찔려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57); 마음에 찔려 <사도행전 2:37~41, 7:54~60>

일요시사 0 1472 0 0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이 시간에는 회개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며, 정결함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있어지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습니까? 지금 코로나로 인한 위협 속에서, 교회가 세상 가운데 계속 지탄을 받는 상황 속에서, 예배 모임조차 마음껏 못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의식 있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함을 선포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무절제한 삶, 주변의 아픔과 어려움을 돌아보지 못한 삶, 신앙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그저 그저 그렇게 살아왔던 삶. 주일마다 예배하면서도 정작 그 예배에 대한 감사가 없었고, 일상의 삶에 누려가는 행복에 감사가 없었던 우리의 삶. 지금 돌아볼 때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찔림”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무감각함을 벗어던지고, 영적 나태함을 벗어던지고, 한 걸음 더 주님 앞으로 깊이 다가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나의 영적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끊임없이 행함에 대해 강조를 합니다. 그러면서 거울의 비유를 설명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고 그냥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 오늘도 여러분들 교회에 오기 전에 거울을 보셨지 않습니까? 거울을 보면서 뭐가 묻었으면 떼어내고, 뭐가 낫으면 화장품으로 좀 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서 뭐가 묻었는데도 “어 묻었네.” 그러고 말고, 머리가 막 헝클어져 있는데도 보기만 하고 정리도 하지 않고, 그러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그런 말씀 드렸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들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말씀이 문제인가요? 그 말씀을 받은 내가 문제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그 말씀에 나를 비춰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마음에 찔려”도 말씀이 선포되어진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2장과 7장에 보면 설교가 나옵니다. 2장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고, 7장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스데반은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우리가 전체 내용을 다 보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 2장과 7장을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전체적인 골자는 똑같습니다. 구약의 예언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역사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이 이겁니다. “예수님을 너희가 잡아 죽였다.” 

  

이러한 설교에 대해서 오늘 두 군데 모두 똑같은 반응이 나옵니다. “마음에 찔려.” 먼저 2장 37절을 볼까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믿는 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다른 본문인 7장 54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귀를 막고 손에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쳐 죽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순교를 당합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회개의 길로 가고, 한 편에서는 더 큰 죄악의 길로 갑니다. 한 편에서는 회개함으로 살 길을 찾고, 한 편에서는 오히려 죽이는 길로, 또한 죽는 길로 향합니다.

  

“마음에 찔려.”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자신의 죄악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스데반을 쳐서 죽인 사람들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찔림이 있을 이유가 없겠죠. 하지만 저들은 마음의 찔림을 회개가 아닌 분노로 표출합니다. 마음에 찔리는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나의 잘못된 부분을 비추는 것까지는 똑같이 갔는데, 나의 모습을 고쳐 다듬은 사람도 있고, 오히려 거울을 깨버린 사람도 있는 겁니다. 거울을 깨버린다고 내 흐트러진 것이 사라지나요? 나를 바꾸지 않으면 그대로입니다. 말씀에 나를 비추어 깨끗함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자존심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십자가 앞에서 내 자존심을 내세웁니다. 내 자아를 강하게 붙잡습니다. 자존심 꺽는 걸 죽기보다 더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치죠.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죄를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반응을 하죠.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너도 이건 아니잖아.”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딱 끝내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의 복음을 만방에 다니면서 전파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학식, 자신의 능력을 내세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거예요.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온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다.” 바울이 소위 얼마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까? 얼마나 내세울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기에 바울은 더욱 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교만의 본성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계속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참 우습지만, 촌철살인과 같이 의미 깊은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안에서 깨면 병아리, 밖에서 깨면 후라이.” 달걀의 껍질이 깨진 것은 똑같은데, 내가 안에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는 것이고, 누군가가 밖에서 두드려서 깨면 후라이가 됩니다. 이왕이면 후라이보다 병아리가 되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나를 깨는 나의 결단입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나의 결단입니다. 내가 내 자아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거기에 부활이라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본문 2장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마음에 찔려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대답하죠. “너희 죄를 회개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내 죄를 회개하는 것,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 나의 결단입니다. 그 뒤에 성령의 선물이 임합니다. 구원이 임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찔림이 십자가에 나를 못박는 결단으로 이어져 생명의 역사에 동참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부활의 확신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가 죽어도 살 것이요,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마지막 예수님의 물음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살아갈 때에, 부활의 확신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어디서 올까요?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의 소망, 이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에는 구원의 확신, 부활의 소망이 확고하지 않아서, 마치 살얼음판을 지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처음에 말씀드린 주제와 같습니다. 

  

회개가 뭘까요? 회개는 결단입니다. 내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하다가 이제 줄여가야지, 이제 조금만 해야지. 그게 아니라 아예 끊어내는 결단입니다. 그럼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정말 하나님께 전심을 담아서 회개한 때가 언제였는가? 우리가 교회에 오자마자 앉아서 기도하시잖아요. “하나님! 오늘도 주님 전에 나와서 예배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진짜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의 고백이셨나요?   

  

우리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하는 것은 마음의 찔림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춰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올라서서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는 신앙적인 결단을 이루는 겁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부활의 확신 위에 서는 것입니다. 어지간한 시험이나 문제들로 인해서는 흔들리는 않고 믿음의 길을 굳건히 걷는 겁니다. 더 이상 살얼음판 같은 신앙의 길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를 걷는, 부활의 확신 위에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질문 앞에 담대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음으로 부활의 확신 위에 굳건히 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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