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6) 이렇게기도하라!(2)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6) 이렇게기도하라!(2) <마태복음 6:9~13>

지난 주에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만연해있었던외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대로, 주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간구와 하나의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섯 가지의 간구는 또 다시 하나님을 향한 간구 세 가지와 인간 삶을 위한 간구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오늘은 나머지 세 가지의 간구,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한 기도 세 가지와 더불어서 마지막 주를 향한 찬송까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네 번째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주기도문의 여섯 가지 간구와 하나의 찬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인 동시에, 내 삶의 결단을 포함합니다. 이게 주기도문의 기본 성격입니다. 함께 주기도문에 담겨진 의미를 다시 한 번 잘 새겨보고, 앞으로 더 전심을 담아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고자 믿음으로 결단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인간 삶에 대한 간구, 그 첫번째가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뭔가 좀 더 대단한 것을, 영적인 것을 구하면 좋을 터인데, “일용할 양식”이라니.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가르쳤는데, 왜 여기 주기도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인가? 너무 세속적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이겁니다. “오늘 한 날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드리오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옵소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한 날의 삶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세속적인 기도가 아니라, 정말 겸손한 자족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만나 사건이죠.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나고 썩어 없어집니다. 딱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침이라고 하면 하루가 시작되는 희망과 소망을 그리게 되잖아요. 하지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만나가 내릴까? 오늘도 우리가 하루를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저들에게는 하루의 삶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그야말로 삶의 전부인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일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생명을 담은 기도입니다. 한 날의 삶, 매일 내게 주어지는 그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기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길 바라는 기도, 하늘을 바라보는 기도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이런 의미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한 날의 삶을 주님 앞에 맡겨드리오니, 내 신앙, 내 생명, 내 건강, 내 모든 삶의 걸음, 우리 주님께서 책임져 주옵소서.”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사,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그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간구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인간 삶의 두 번째 간구는 “죄 사함”의 기도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치 거래와 같기도 하고, 조건식의 기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에 이어지는 말씀에는 비슷한 내용이 한 번 더 반복되기도 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칫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를 해야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처럼 비춰질 수 있죠.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라도할지니라.” 이어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임금이 종들과 채무를 결산하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습니다. 당장에 임금은 빚진 자를 데려다가 빚을 독촉하는데, 갚을 능력이 없음을 보고는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용서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겁니다. 

  

이 종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이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받은 용서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빚을 십자가 보혈로 갚아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알 때, 비로소 나에게 잘못을 행한, 나에게 죄를 지은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집니다. 그래서 본문의 표현 자체는 내가 먼저 용서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실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내게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용서! 쉽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도 용서! 어렵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 어려워요. 오늘 해보려고 했는데, 얼굴 봤더니 또 분노가 올라왔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그렇게 천천히 가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순간 용서가 되어지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 때 비로소 내 죄도 완전히 사함받는 용서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 주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까지도 용서할 줄 아는, 용서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간구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13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지막 간구에는 같은 의미를 지닌 두 가지 기도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먼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 가운데서 지켜주시길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주는 시험이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시험은 사탄 마귀가 주는, 또한 세상에서 주는 나를 넘어뜨리려는 시험입니다. 사탄 마귀는 인간을 시험 할 때에 두 가지 무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뭘까요? 달콤함과 두려움입니다. 사탄 마귀가 주는 크고 작은 “달콤함과 두려움”의 시험과 유혹이 늘 다가옵니다. 잘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잘 분별함으로 이겨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는 적극적인 구원의 소망을 담은 기도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악이 존재합니다. 가깝게는 내 안에 있는 죄악의 쓴뿌리, 고쳐지지 않는 본성적인 악이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의 기본적인 관습 속에 담겨진 악도 있습니다. 한편 문화적인, 사회적인 것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치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훼손되어가게 만드는 악도 있습니다. 

 

 [침묵]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작가 엔도 슈샤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다.” 먼지가 쌓이는 것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 쌓이면 완전히 굳어져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사탄 마귀의 유혹, 악의 세력이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악의 세력에서 내 힘만 가지고, 내 의지만 가지고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건져 주옵소서.” “하나님 내 잘못된 성품, 고쳐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바꿔가는 거예요. 우리의 일평생의 삶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싸움이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이어질 싸움입니다. 그렇기에 “정신을 차리고,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영적인 경각심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 붙드시심 안에 의의 길로 인도함 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은 찬양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본문 13절 후반부에 말씀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성경을 보면, 이 부분에 괄호가 쳐져 있을 겁니다. 성경에서 괄호가 있는 부분은 어떤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다는 의미입니다.초대교회 시절에 주기도문을 예배 때 많이 암송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다 마친 다음에 마무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는 뜻에서 이 내용을 첨가한 것이 오늘날 이렇게 굳어지게 된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예전 성경에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대개”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 원문에는 “호티”라는 말입니다. “호티”는 “왜냐하면” 이런 뜻입니다. “대개”는 한자어인데,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큰 뜻으로 보건대, 또는 일의 큰 원칙으로 보건대”라는 뜻입니다.  왜 처음에 이 말로 번역을 했는가? 주기도문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일방적인 간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함과 동시에 나도 이 간구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살겠다는 결단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라는 말과 함께 해석을 하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대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그런 의미로 이런 번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대개를 넣어야 하나? 빼야 하나?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됩니다. 우리교회는 넣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모든 간구와 기도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기도의 모범입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주신 바 말씀의 의미를 새겨, 간구와 결단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모든 영광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만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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