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04)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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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04)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데살로니가전서 5:12~24>

일요시사 0 19 0 0

할렐루야!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금년 2024년 대림절 기간에 강단에서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의 주제는 지난 몇 주간 동안 계속 살펴본바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로, 두 가지 기다림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는 구원의 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향한 기다림이요, 또 하나는 심판의 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이 중 첫 번째 기다림인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이천여년전, 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이미 일어난 사건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기다림인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기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앞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자의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는 주후 50년경에 기록된 서신으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하시고 20년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으로 바라보되, 오늘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이게 바로 바른 종말론적인 신앙과 삶의 자세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 뭔가요? 오늘 제목처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신앙적으로나 삶적으로나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잘 지켜가는 것도,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본문 24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나는 부족하지만, 신실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미국의 비평가인 제임스 로웰이라는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는 언어의 빈곤 속에 살고 있다.” 언어의 빈곤 속에 산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한마디로 “아무 말이나 막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본문 12절에서 15절까지는 모두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요? 바울이 데살로니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이었고, 그때 바울과 함께 했던 자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입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해 생명까지도 걸 수 있는 이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더 이상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닌 “우리”라는 위대한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권하는 것 세 가지가 이어집니다. 먼저 13절에 “사랑 안에서 서로 귀하게 여기며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크게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이죠. 이어서 14절에는 “게으른 자들이 있으면 잘 권고하고, 약한 자들이 있으면 격려해주고, 힘이 없는 자들은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이 뭔가요? “오래 참으라.” 앞서 나오는 권고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고, 이 모든 일을 할 때에, 한 번 하고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오래 참음으로 꾸준히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15절에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또한 “서로를 대할 때든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든지 언제나 선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나 믿음의 백성으로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바른 관계,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아시죠? 누군가는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만날 때마다 부담되고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평안함과 부담스러움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너와 나”로 있으면, 늘 어려울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되면 평안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화목함과 오래참음과 선을 따름”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잘 맺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본문 16절에서 18절에 보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두 다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하나님의 뜻인 것은 알지만, 우리네 삶에 기쁨만이 있던가요? 근래 우리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경제적인 현실을 바라보면, 자녀들의 신앙의 모습이나 앞날을 바라보면, 기쁨보다는 탄식이 앞 설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음은 하나님 주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럼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이 말씀 앞에 나오는 내용은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포도나무 비유의 주제는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되시고, 나는 그에게 붙어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는 삶. 하나님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가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럼 왜 오늘 본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그 불가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는 것인가요? 이 역시 연결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내가 기도할 때에는 정말 전심으로 기도함과 동시에, 언제나 내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게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마지막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세상에 늘 감사할만한 일들만 있던가요? 도리어 불평하고 원망할만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음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그 뜻을 행하는 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계속 이어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나 자신의 바른 신앙의 삶입니다.


 ‘축구 황제’라고 불리우는 ‘펠레’의 일화입니다. 펠레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맨발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도 왕년에 축구 선수였지만, 이제는 병원에서 청소와 허드렛일을 하며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어느날 펠레는 몰래 친구들과 담배를 피다가 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 크게 야단 맞을 것을 걱정하던 펠레는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축구에 재능도 많고, 대단한 선수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지만,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90분 동안 전력으로 뛸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네가 선택해라!” 그러면서 아버지는 낡은 지갑에서 담배를 살 돈을 꺼내 주었습니다. 펠레는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아들에게 축구화 하나 사주지는 못했어도, 아들의 시합이 있을때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절뚝거리며 경기장을 찾아주었던 아버지, 병원에서 변기를 닦고 바닥에 걸레질을 하면서도 불평 한번 없었던 아버지, 그날 이후 펠레는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펠레는 당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아버지의 충고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축구 황제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화들은 정말 많습니다. 어떤 분야에서건 탁월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수고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바른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삶의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어감에 있어서도 절제해야 할 것이 있고, 더 힘을 내야 할 부분도 있고, 수고와 희생과 헌신을 쌓아가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의 바른 신앙의 삶도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본문 19절에서 22절까지 말씀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네 가지를 말씀하죠. 먼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주의 일을 해나가면서도 영적인 것을 외면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친 은사주의도 경계해야겠지만, 영적인 은혜를 외면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여기서 예언은 앞날을 예견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입니다. 이어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좋은 것이 뭔가요? 나의 이익을 추구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죠. 믿음의 백성으로서 선한 것, 덕을 세우는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서 모양이라는 말은 그 생긴 모습을 뜻하는 게 아니라, “종류”라는 뜻입니다. 악한 것은 그 종류를 구분할 것 없이 다 버리고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결과를 23절 중반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나 자신의 바른 신앙을 잘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순서상으로는 마지막에 보았지만, 앞서 나눈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출발은 나 자신의 신앙이 바로 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신앙이 바로 세워져 있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 가운데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이미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럼 주님 다시 오실 때에도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바른 신앙의 반석 위에 서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잘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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