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인문학 산책 ] 다산 정약용! 동양과 서양, 유교와 기독교 사이의 다리 역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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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인문학 산책 ] 다산 정약용! 동양과 서양, 유교와 기독교 사이의 다리 역할하다!

일요시사 0 71 0 0

<지혜의 공명: 정약용의 인생조언과 성서의 가르침의 공명>


서언: 우리에게도 '세계적인 스승'이 있습니다



​뉴질랜드 교민 여러분께,

​__<성서와 인문학 산책>의 다섯 번째 여정은 우리 역사가 낳은 위대한 스승,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과 함께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아브라함, 키루스 대왕, 소크라테스 등 서양 정신사의 거인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혹시 ‘성서와 인문학’이라는 주제가 서양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계셨다면, 오늘 그 생각을 자랑스럽게 내려놓으셔도 좋습니다.

조선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있었다면, 그들을 종합하고 뛰어넘어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거두가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의 사상적 깊이와 인간에 대한 통찰은 서양의 괴테나 도스토옙스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다산이야말로 동양과 서양, 유교와 기독교 사상 사이에 거대한 다리를 놓은 인물이며, 그의 지혜가 성서의 가르침과 얼마나 깊이 공명하는지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특히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아가며 때로는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셨을 교민 여러분께, 우리 사상의 뿌리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위대한지를 확인하는 자긍심의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본격적인 산책에 앞서, 우리가 만나게 될 이 위대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의 지혜가 어떤 삶의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가 남긴 말의 무게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의 삶과 시대


​__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천재이자, 르네상스형 인간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는 정조(正祖) 시대, 조선의 마지막 문예부흥기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정조의 개혁 정치의 산실이었던 규장각(奎章閣)의 신진 학자로서,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과 더불어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지식은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유학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는 기본이었고, 백성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학문, 즉 실학(實學)을 집대성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 접했던 서학(西學), 즉 천주교 사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떴습니다. 그의 박학다식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원 화성(華城)을 축성할 때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기중기(起重機)’를 발명하여 공사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건축가이자 과학자였으며, 역학(易學)과 점성술에까지 조예가 깊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학문과 삶에서 완벽하게 구현해 낸, 가히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부를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삶은 1800년, 개혁 군주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가라 앉게 됩니다. 

정조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 벽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정적(政敵)이었던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辛酉迫害)**입니다. 

천주교를 빌미로 한 이 박해의 칼날은 정약용의 가문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형 정약종은 순교했고, 셋째 형 정약전(' 자산어보' 를 저술함, 영화化됨)은 흑산도로, 그리고 정약용 자신은 머나먼 땅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한순간에 나라의 동량에서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바로 이 18년간의 혹독한 유배 생활이라는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그의 지혜는 비로소 불순물이 제거된 순금처럼 제련되었습니다. 다산의 사상은 서재에 갇힌 탁상공론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지혜서(욥기, 잠언 등)와 예수의 가르침 역시 안락한 강단이 아닌, 고난과 역경의 삶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류 보편의 질문에 답했던 두 위대한 지혜의 전통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공명을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1부: 덕성 있는 품성의 구조: 내적 기질과 자기 수양

올바른 삶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정약용과 성서는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규칙을 따르기 이전에, 내면의 올바른 성품을 가꾸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모든 선한 행동은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야말로, 두 지혜 전통을 관통하는 첫 번째 공명입니다.

모든 지혜의 시작, '겸손'과 '심령의 가난함'

​__덕을 쌓는 여정의 첫걸음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입니다. 정약용은 이를 ‘겸손’이라 불렀고, 예수는 ‘심령의 가난함’이라 표현했습니다. 용어는 다르지만, 교만이야말로 지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통찰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다산에게 겸손은 사람을 얻는 가장 실용적인 지혜였습니다. 그는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타인의 말에 귀를 닫아 결국 고립되지만, 겸손한 사람은 주변의 지혜를 흡수하여 성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더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률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 사회적 차원의 겸손을 신(神)과의 관계로까지 심화시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 첫 번째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마태복음 5:3) 여기서 ‘심령의 가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파산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완전한 의(義)에 이를 수 없다는 철저한 자기 인식입니다. 


이 영적인 겸손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산의 겸손이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위한 덕목이라면, 성서의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위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랍도록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웃에게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두 지혜는 모두 교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모든 관계와 지혜의 출발점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썩은 세상을 정화하는 힘, '청렴'과 '의로움'

​__겸손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 마음은 반드시 삶 속에서 깨끗함과 올바름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정약용과 성서는 개인의 고결함과 사회적 정의를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가치로 보았고, 이는 타협할 수 없는 윤리적 명령이었습니다.

​다산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그에게 **청렴(淸廉)**과 **검소(儉素)**는 공직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자,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검소한 생활이 청렴한 마음의 바탕이 되고, 그 청렴한 마음이 있어야만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愛民)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었습니다.

성서 역시 ‘의로움’을 향한 불타는 갈망을 신앙인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꼽습니다. 산상수훈의 네 번째 가르침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6)**입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함을 넘어, 하나님의 공의가 내 삶과 사회 전체에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이 ‘의로움’은 정직한 상거래, 약자에 대한 보호, 사회 정의의 실현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두 전통 모두 청렴과 의로움이 없다면 건강한 개인도, 지속 가능한 사회도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다산은 청렴의 부재가 국가 멸망이라는 현실적 결과로 이어진다고 경고했고, 성서는 의로움의 결핍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결과를 낳는다고 가르칩니다. 그 종착역은 같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공동체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지혜, '애통'과 '자기 교정'

​--덕성 있는 삶이란 완벽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고쳐나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정약용과 성서는 자신의 잘못과 세상의 아픔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슬픔, 즉 **‘애통(哀痛)’**이 나약함이 아니라, 더 깊은 지혜와 치유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산에게 배움이란 곧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는 **“배움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릇된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진정한 앎은 자신의 무지와 실수를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가르침,]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는 이 자기 성찰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끕니다. 여기서 ‘애통’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자신의 죄와 세상의 불의에 대해 깊이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위로라는 신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지혜는 모두 자기기만을 버리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가 성장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이성적 성찰을 통해(정약용), 혹은 신 앞에서의 회개를 통해(성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부: 시련 속의 지혜: 역경과 고난의 극복

인생의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찾고 존엄을 지킬 수 있을까요? 정약용과 성서의 지혜 전통은 고통을 인내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성장할 수 있는 심오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특히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은 그의 사상이 어떻게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산의 유배: 절망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시간

1801년, 정조의 총애를 받던 40세의 엘리트 관료 정약용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시작된 신유박해는 천주교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그를 옭아맸고, 그는 머나먼 땅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기약 없는 18년의 세월, 그것은 한 인간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산은 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을 학문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배 초기, 죄인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머물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그는 주막집 골방(사의재)에서부터 시작하여, 훗날 외가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초당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무려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 바로 이 고통의 시간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의 유배지는 절망의 공간이 아니라, 실학을 집대성하는 위대한 학문의 산실이 된 것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단순히 저술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배지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고매한 인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백성과의 교감: 그는 유배지에서 비로소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뼈저리게 목격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 공동체(다산학단)를 만들어 18명의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그는 차(茶)를 매개로 이웃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같은 지기(知己)를 만나 학문적 교유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초연한 자세: 그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정적들과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두 아들과 형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며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학문을 독려했습니다.(** 특히 흑산도로 유배된 둘째형 정약전과의  각각의 유배지에서

 서신왕래등은 눈물과 감동의 기록으로 남아 있음, 영화'자산어보' 에서의 명장면중하나**...)


독서를 통한 지혜의 탐구와 절도 있는 품성의 유지는 그가 고난을 이기는 힘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산은 고난을 통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졌습니다. 그의 삶은 역경이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한 정신을 낳는 자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고난 속에 빛나는 인품: 성서 인물들과의 공명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차원의 지혜와 인품을 보여준 다산의 모습은, 성서 속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됩니다.

욥(Job)의 인내: --구약성서의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의 대명사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몸에는 끔찍한 악창이 돋았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며 정죄했지만,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더 깊은 영적 체험으로 이어졌고, 이전보다 더 큰

 축복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산이 정치적 모함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학문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

하지 않았던 모습은 욥의 인내와 깊이 공명합니다.

선지자들의 고독 (이사야와 예레미야):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동족에게 멸시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왕에게까지 책망을 서슴지 않아 많은 시련을 겪었고, 전승에 따르면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켜져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며 평생을 고독과 슬픔 속에서 살았고,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구덩이에 던져지기까지 했습니다. 다산 역시 부패한 시대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선지자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유배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선지자들의 고독한 사명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 --신약성서의 위대한 사도 바울은 그의 신학이 가장 깊어진 서신들,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것을 절망의 조건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갇힌 것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 (빌립보서 1:12)고 고백하며, 감옥 안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그의 가장 위대한 저작들을 집필했듯, 바울 역시 고난의 장소를 인류를 위한 위대한 메시지가 탄생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산과 욥,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고 무엇을 남기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1부 결론: 고난을 넘어선 유산


​다산 정약용의 삶 전반부, 특히 그의 유배 생활은 한 인간이 어떻게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500여 권의 저술이라는 불멸의 유산으로 승화되었고, 후대의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를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책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이는 


2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의 사상이 어떻게 구체적인 사회 개혁의 청사진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저에 깔린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산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남길 것인가?

                                                                           


홍영표

연세대 졸업,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M.B.A)

한신대 신대원 M,div 졸업( 신학석사), 

한신대 대학원 박사과정( P.H.D)수료

오클랜드 한인회장, 대양주한인회 총연합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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