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2)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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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2)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요엘 2:28~32>

일요시사 0 50 0 0

할렐루야!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블레즈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향해 이런 고백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안에 담겨진 뜻은 하나님은 논리 속에 있는 이론적인 분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서 직접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저 멀리 계신 분,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딴 세상을 살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고, 나로 인해 눈물 흘려 안타까워하시고, 또한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늘 나와 가까이 계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마도 우리 성도님들은 복음성가 하나가 떠올랐을 겁니다. 어떤 찬양인가요? [마지막 날에] 이 찬양의 배경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사실 [마지막 날에]라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엘서 전체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좀 더 정확하게 제목을 짓고자 하면, [마지막 날에]가 아니라,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라고 해야 맞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죠. 어떤 일 후인가요? 2장 전반부에 나오는 메뚜기 떼의 재앙 이후입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향한 징계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돌이키길 원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어서 본문 31절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소선지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최후 심판의 날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그 마지막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에게 임할 징조와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큰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말하곤 합니다.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면 말하곤 합니다. 뭐라고 말할까요? “말세다. 말세야.” 하지만 말세의 때는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진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예수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은 다 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말세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떤 징조가 우리에게 임할 것이요, 우리는 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8절과 29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것이다.” 내 영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의 임재를 직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사건이 무엇인가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강림의 역사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그럼 말세의 때에 왜 이러한 성령의 임재가 있어져야 하는가? 한 번 따라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는데, 첫 번째가 누구에게 부어준다고 되어 있습니까?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여러분 가지고 계신 성경책에 보면 아마 만민 앞에 숫자 1이 써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페이지 제일 아래 보면 역시 숫자 1이 쓰여 있고, 뭐라고 되어 있나요? “모든 육체”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기,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땅에 번성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저들은 육신이 됩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 이러한 육신이 된 인류를 향해 다시금 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왜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살아있는 존재가 된 우리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야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꼭 사모하고 붙잡아야 할 것이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럼 성령의 충만함이 무엇인가요? 고린도전서 2장 10절과 11절에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 충만함의 증거를 말씀합니다. 성령충만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그 안에 담겨진 은혜가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데,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새겨지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이게 성령충만의 증거입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고, 힘을 다해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성령충만함으로 주님 맞을 준비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주님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은혜와 사명에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 각자에게 주시는 사명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감당하는 사명, 대단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먼저는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함이 최선입니다. 본문 28절 중반부터 29절까지 말씀하죠.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내가 또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차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본래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만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모든 만민에게, 구체적으로 자녀들, 나이가 많은 이들, 젊은이들,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확장됩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감당할 각각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죠.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각각에 주어지는 은혜가 다릅니다. 그에 따른 사명 또한 다릅니다. 그 모든 다름을 가지고, 서로 돕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통해 합력하여 선하심의 역사, 하나됨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 그 은혜를 먼저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혜를 가지고, 충성되이 사명 감당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주님 예비하신 크신 상급 또한 받아누릴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32절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마지막 여호와의 날,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은 누군가에는 죽음의 날이요, 누군가에는 생명의 날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저 지옥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요, 누군가에는 저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됩니다. 그럼 누가 생명의 자리에 서고, 누가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누군가 그날 읽을 차례라고 이사야서를 들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딱 펴서 읽으셨는데, 그 말씀이 마침 이사야 61장의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장에 인용한 이사야 61장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시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공생애 모든 활동은 구원의 역사를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길은 주의 날이 이를 때까지 계속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낙심될 때가 있을지라도, 내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걸음을 저 천국까지 이어가야 합니다.이를 위해 언제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또한 주신 사명 힘써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언제나 구원의 확신 가운데 흔들림 없은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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