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55) 내게 주신 귀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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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55) 내게 주신 귀한 이름 <빌립보서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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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내게 주신 귀한 이름”입니다. 오늘은 부제가 있습니다. 부제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구원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죄악 속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로 인한 상처와 아픔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만지시고 치유하신 이름입니다. 동시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상처난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치유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의 이름이요, 하나님과 인간이 가진 모든 상처가 사라지게 한 이름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마음껏 나아갈 수 있게하는 능력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를 감사함으로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이처럼 오늘 제목과 같이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이름이 되셨습니다. 이 안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그 이름 자체의 위대함이고, 더불어 우리가 함께 나눌 것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가 갖게 된 새로운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그 귀한 이름을 나의 구원의 주로 믿고 영접한 자에게 주신 또 다른 귀한 이름이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동일하게 소유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함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대림절 기간,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러한 예수 오심의 기쁨이 충만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이름, 구원의 이름 예수, 더불어 믿는 자에게 허락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귀한 이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믿음으로 결단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가장 귀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이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때에, 이름을 바꿔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람을 부르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그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은 어떤가요? 살기 등등하게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던 자,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던 사울을 찾아가시고 만나주시사 새로운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복음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삶의 변화를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러나”로 시작되죠. 그럼 무엇에 대해서 “그러나” 부정하면서 말하고 있는지 앞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앞서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형식적인 겉치레만을 내세우는 자들을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증언입니다. 대표적으로 5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한 마디로 “보여지는 것을 자랑하려면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에 이어서 오늘 본문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율법적으로, 유대적으로, 형식적으로, 민족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심지어 8절 후반부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요? 8절 중반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어서 9절 중반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사울이었던 바울은 히브리인으로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사울이었던 그는 바울이 되어 복음의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과 힘과 경험으로 추구하던 율법적인 의로움을 벗어 버리고, 예수 십자가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하고 붙잡은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붙잡았기에,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전에 가졌던 자랑할만한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깁니다. 오직 주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생명까지도 바쳐 사명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주신 가장 귀한 것,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꼭 붙잡아야 합니다. 가장 귀한 것,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만을 붙잡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차례 말씀드렸죠. “복음은? 예수 십자가 부활이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에도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죽으심도 본받는다.” 이어서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 교회학교에서 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돼요. 예수님 잘 믿어야 해요. 말씀대로 살아야 해요.” 그런 중에 한 아이가 말했다고 하죠. “죽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요?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죽어야 해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공표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 자신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게끔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안에는 바울의 확고한 부활의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서 44절까지 말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 믿는 자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너무나도 명확하게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썩어질 것이요, 욕된 것이요, 약한 것이요, 육의 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는 순간에,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러한 부활의 영광을 향한 사모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에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삶 뿐만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모든 삶에도 변화를 경험하고, 또한 기대하는 것입니다. 죽음조차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됨의 확신을 가질 때에,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정말 주를 위해 죽는 길을 택합니다. 또한 죽는 길, 십자가 고난의 길을 택했을 때에, 결국에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증거가 내게 주신 귀한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에 참여한 진실된 신앙의 이름입니다. 내게 주신 귀한 이름, 그리스도인, 그 이름에 합당한 십자가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확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천국과 같은 삶의 환경에서, 정말 천국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때로 힘겹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옆에서 바라보면, 천국과 같은 삶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도행전 26장에 바울을 심문하던 베스도 총독의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신앙을 가진 자로서의 눈으로 볼 때에도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 본인은 어떤가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은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내가 넘치도록 수고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을 당하고, 자지 못하고 굶고 축고 헐벗었노라.” 무슨 자랑이 이렇습니까?


그럼에도 이 모든 수고와 위험과 고난이 바울의 자랑이 되는 것은 그 안에 주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이 지금 생명의 길을 걸어갈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길을 전하고 있음에,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또한 보내셨음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힘겹게 걸어가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천국의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확실한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주를 향한 믿음 가지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주의 십자가로 죄 사함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 십자가 부활을 향한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예수님과 동행하며 천국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낄 뿐만 아니라,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런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한 증거를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 예수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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