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5); 성숙한 신앙, 확고한 믿음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65); 성숙한 신앙, 확고한 믿음 <히브리서6:9~12>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갓난 아기도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금새 자라납니다. 이처럼 성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성숙은 다르죠. 세월이 흐른다고, 나이가 먹는다고, 그와 함께 육체가 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성숙은 인격적으로, 또는 성품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이는 한 성도 개인의 모습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한 교회의 모습도 성장이 있으면 반드시 성숙도 함께 가야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신앙의 성숙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으로는 9절부터 보았지만, 앞선 5장 후반부터 보면, 갓난 아기와 같은 신앙에 대해 지적합니다. 이어서 6장 1절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말씀과 함께 좀 더 성숙한 신앙에 대한 권고가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말씀의 중심이 흔들리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내용을 보면 권고보다는 경고에 더 가깝습니다. 5절과 6절에 말씀하죠. “말씀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 이는 십자가를 욕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 믿음을 잃고 흔들리는 자들, 이른 바 배교자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입니다.그럼 왜 저들이 흔들리고 있는가? 복음은 접하였는데,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이루었는데, 신앙의 성숙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나온 겁니다. “성숙한 신앙, 확고한 믿음”.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신앙의 삶 속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삶이 세상 속에서도 성숙한 인격과 성품을 통한 존경받는 삶으로 이어져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향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행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더 좋은 것을 가진 자로서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9절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교회의 역사 속에 보면,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었을까? 더 좋은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초대 교회에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이 있습니다. 그는 계시록에 칭찬받는 교회로 불리운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면서 논쟁할 때에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안고 교훈을 주신 일이 있는데, 그 아이가 폴리캅이었다라는 야사도 있습니다.그는 서머나교회에 박해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에, 로마 총독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폴리캅이 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이고 선한 사람임을 알았기에, 그를 풀어주고 싶어서 회유를 했습니다. “당신이 지금이라도 황제에게 절하고 예수를 저주하면 풀어주겠오.” 


하지만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86년 동안 나는 주님을 섬겨 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나를 나쁘게 대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폴리캅은 결국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화형을 당하는 사람은 극심한 고통으로 불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해서 보통 완전히 결박을 하고 화형을 집행합니다. 군인들이 폴리캅을 화형대에 묶으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주의 능력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묶이길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꿈쩍도 하지 않고, 화형의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 “이보다 더 좋은 것” 가장 귀하고 귀한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미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줄 믿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귀하고 좋은 것들이 정말 많지만, 지금 내가 구하고 바라는 것들도 많겠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귀하고 더 좋고 더 아름다운 것,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가장 존귀한 것, 예수 십자가 구원의 확신이 이미 여러분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언제나 더 좋은 것을 가진 자로서 성숙한 신앙으로 확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본문 9절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을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으로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가 먼저이지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처음 시작이 “확신하노라.” 이 말씀부터입니다. 확신한다는 선포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6장 전체를 보면, 특별히 4절부터 오늘 본문까지 쭉 이어서 보면, 하나의 대조적인 구조입니다. 4절에서 8절까지는 믿음을 잃고 떠나간 배교자들, 9절에서 12절까지는 환란 중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순교자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 이렇게 다른 두 그룹의 극명한 대조입니다.그러면서 본문 9절에 “내가 확신하노라.”라는 선포를 하는데,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가? 본문 10절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 보면, 믿음을 지키고 있는 이들, 즉 지금 히브리서의 말씀을 받는 모든 성도들의 행위적인 모습이 나오고 있죠. 어떤 행위들인가요? “그의 이름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 자로서, 주의 가르치심 따라서 사랑으로 베풀고 섬기고 헌신한 모습들이 보이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확신합니다. “저들은 주의 제자로서, 또한 구원 받은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우리의 모든 삶, 하나님께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믿는 자로서 살아가는 그 모든 모습들, 나로 하여금 ‘저들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구나.’ 확신하게끔 했던 그 삶의 태도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 우리도 주의 백성으로 기쁘게 사명 감당합니다. 때로는 믿는 자이기에 억울해도 참고 견디고, 억지로 이겨내려는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의무감으로 나누고 베풀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져 성숙한 신앙의 모습이 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정말 귀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우리의 모든 사랑과 수고와 헌신이 담긴 삶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더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내 삶을 통해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증거하고, 더 확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성도들을 향해 따스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음을 내가 알고 있다. 너희들이 믿는 자로서 주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음 또한 내가 보았고, 하나님께서도 잊지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따스한 칭찬과 함께 한 가지 권고를 전합니다.

본문 11절과 12절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 무엇을요? “너희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즉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감으로 온전한 소망을 이루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를 위하여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3장에 바울이 말하죠.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아무리 바울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본받으라.” 이거 상당히 교만한 표현 아닌가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완벽하기에 나를 본받으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앞에 보면 바울이 선포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여전히 힘을 다해 달려가는 중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바라볼 때에, “저 사람은 완벽해. 그러니까 저런 사람을 본받아야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너무 완벽하면 기준으로 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죠. 우리가 늘 “예수님처럼” 인사는 하지만, 사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요? 모세만 해도, 바울만 해도, 다윗만 해도 가까이 갈 수 없을만한 인물들이잖아요.그럼에도 저들이 믿음의 인물로 불리우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저들이 오늘 본문에 “믿음과 인내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 그래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로 증거되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앞서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내가 달려가노라.” 저들은 끝까지 소망을 품고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넘어지고 실족한 일도 있었습니다. 때론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다시 일어나 주의 약속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다윗 스스로도 고백했죠.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주의 손을 의지함으로 온전한 소망을 성취하고자 나아갑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믿음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모습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저 먼지 하나도 없는 완전 무결한 이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중에도, 믿음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소망의 내일을 바라보고 힘을 다해 달려갔던 이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 주신 약속의 기업을 받아낸 이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혹 부족하여도, 혹 연약하여도, 혹 실망하고 넘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앞서간 저들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결국에는 하나님 주신 약속의 성취를 위해,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순간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본이 될만한 신앙으로 서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성숙한 신앙,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신앙의 성숙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모습이 세상의 삶에도 인격적인, 성품적인 성숙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서 확고한 믿음 가지고, 본이 될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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