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0) 준비된 심령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태복음 3:1~12>
우리 기독교의 3대 강령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가지고 살아갑니다. 또한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죠. 누구인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살아갑니다. 더불어 내 이웃을 향해서도 믿어주고, 소망을 품고, 사랑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도덕과 윤리입니다. 왜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방해가 되는가? 도덕과 윤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친구들인 세리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저들은 율법을 잘 지킨 자들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도, 또한 율법에 있어서도 최고의 선을 이루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메시야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던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3절에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대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준비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는 자의 삶은,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 다시 오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심령이 될 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준비된 심령, 예수님을 모실만한 준비가 될 수 있을까요? 사순절, 첫 번째 주일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이렇게 외칩니다. 2절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단강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풂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켜갑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풀기에 앞서 선포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요? 회개를 해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책망합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온건지, 아니면 요한을 감시하러 온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한이 저들에게 “너희들 지금 이 상태로는 진노를 피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옆에 매달린 강도입니다. 마지막 죽음 직전에 회개하며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네가 오늘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하는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다들 그런 생각 한번씩은 해보셨잖아요. 나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죄를 지으며 살다가, 다른 죄를 지을 겨를도 없이 천국으로 직행. 회개는 그런 게 아닙니다.
회개라고 하면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 그렇게 쉽게 생각할 터인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는 한문으로 “뉘우칠 회 자에 고칠 개 자”를 씁니다. “회개 -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마음이나 뜻을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메타노이아는 “뒤로 돌아 가!”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완전한 방향전환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란, 돌이키고, 죄 사함 받아,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주의 은혜가 임합니다. 진정으로 나의 죄를 자복하고, 나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사 임재하십니다. 회개하는 심령, 준비된 심령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죠. “회개란 –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기도하고,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이런 만족감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회개하는 심령에는 반드시 합당한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아무리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임박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독사의 자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자친구가 토라져서 화를 냅니다.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면 남자가 말하죠. “미안해,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여자친구가 묻습니다. “뭘 잘 못했는데?” 그러면 오빠는 뭐라고 하나요? “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면 여자친구가 말하죠. “오빤 그게 문제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지 않나요? “하나님!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래? 네가 지은 죄가 무엇이냐?” 말뿐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당장의 위기만 넘기려하면 안됩니다.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돌이키고 변화를 이루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열매를 보여준 인물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울입니다. 사울의 등장은 스데반의 죽음 그 직후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고, 사울의 이름이 처음 나옵니다. 사실 스데반의 순교 이전까지는 복음의 황금기였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예루살렘에 크나큰 박해가 임하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가면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울은 그날도 기세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대적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핍박자였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뜹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함으로 세례를 받은 후 그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그 삶에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잘못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실수와 꾸중과 용서를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은혜를 힘입어 더 잘하는 쪽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죄의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더 주님 닮아가는, 더 신앙생활 잘 하는, 회개에 합당한 더 좋은 열매를 맺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열심과 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어떻게든 내가 잘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열심으로 인해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용서를 받고 변화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열심이 담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의 열심도 필요합니다.
1986년에 개봉한 ‘미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 보면 로드리고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자신의 이복동생과 펜싱결투를 벌이다가 동생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반년 가까이 죽음을 기다리며 죄책감에 시달리던 로드리고는 자신을 찾아온 가브리엘 신부에게 감화가 되어서, 그의 선교활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가브리엘 신부와 함께 과라니족을 찾아갑니다. 그는 참회하는 뜻으로 사냥할 때 사용했던 무기와 갑옷과 그물들을 한데 묶어서 커다란 덩어리로 만들고, 밀림 속 힘든 길을 걸어갑니다. 과라니족은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가브리엘 신부가 모든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과라니족은 로드리고를 용서해줍니다. 이후에 로드리고는 가브리엘 신부와 함께 식민지 지배세력이 과라니족을 공격할 때에, 함께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완전한 용서, 죄 사함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어떻게든 빚어 만들어가시겠다는 그 사랑으로 지금까지 참아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열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곧 나의 열심입니다.하나님 기뻐하실만한 더 좋은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가는 것, 이를 통해 서론에 말씀드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하나님께, 이웃에게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 이 모든 것이 나의 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열심의 절정은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열심의 절정은 무엇일까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한 나의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