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36; 마하나임의 춤 ( 6장 13-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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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36; 마하나임의 춤 ( 6장 13-14절 )

일요시사 0 1080 0 0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주님을 찾아 밤길을 나서서 주님의 동산에 이른 술람미 여인에게 돌아오라고 부르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소리다. 


앞의 내용을 보면, 술람미 여인은 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었다. 자신의 침실에 누워 안일함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밤길에 주님을 찾아 나선 술람미 여인이다. 오랜 방황 끝에 그녀가 이르게 된 곳은 주님의 동산이었다. 밤길에 순찰꾼과 파수꾼에게 수모도 당하고, 방황하며 어려운 시간들을 지낸 후에 드디어 주님의 동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술람미 여인에게 돌아오고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다. 술람미 여인을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는 무슨 뜻인가?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마하나임은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작은 성읍의 이름으로 춤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고 하느냐? 


주님의 동산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을 부르는 유혹의 소리다. 주님의 동산에 이른 술람미 여자를 부르는 것처럼, 성도들을 부르는 세상의 소리가 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마하나임에서 함께 춤추며 신나게 살자꾸나,,, 세상의 유혹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가면 됐지 하면서 평소에는 세상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지만, 아직 주님의 동산에 들어와 있지 않은 예루살렘의 여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교회에는 들어와 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상적인 가치관과 판단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고, 술람미 여자 같은 성도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성도들을 유혹하는 마음의 소리다. 성도들의 마음 안에도 여러 가지 세상의 유혹이나 욕심들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도 바울도 롬 7:25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기 욕심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늘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다. 한 가지 마음은 세상욕심이나 세상에 속해있을 때의 옛 습관이 수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면서 우리를 지배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마음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순종의 마음이다. 그래서 갈 5:16-17은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 16-17절

15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신의 욕심이란 각종 세상적인 욕심들을 말한다. 물질의 욕심과 육체적 욕망과 명예욕 같은 이기적인 욕심들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은 이타적인 마음이다. 성령께서 희생의 자리,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마음이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마음 가운데서 이기적인 욕심에 빠질 때도 있고, 헌신적인 자리에 나가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섞여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이 서로 대적하게 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성도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끌고 가려는 힘과 자기 욕심대로 살려는 힘이 부딪히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기나?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다. 결국은 성령께서 이기신다. 그래서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과정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저지 않은 것처럼, 성령께서도 서서히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시면서 인도해 가신다. 이런 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다르지만, 내적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완전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지상적 존재로서 인간의 한계다.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사람도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도 없다. 성도란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지만, 여러 모양으로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늘 고백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주님의 은혜의 날개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하나임의 유래를 알고 나면, 이 말에는 아주 은혜로운 뜻이 숨겨 있다. 마하나임은 원래 ‘두 진지’ 또는 ‘진지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땅, 자기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길에 천사의 무리를 만났다. 야곱은 천사의 무리를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창 32:2).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군대로 이루어진 진지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이 왜 은혜로운지는 당시 야곱의 처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당시 야곱의 처지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뒤에서는 라반이 추격해오고, 앞에서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형 에서였다. 에서는 야곱에게 속아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긴 적이 있다. 에서를 만나면 자기 목숨을 빼앗을 것만 같았다. 앞뒤가 꽉 막힌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인 천사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은 두 가지의 위기에서 잘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마하나임의 유래다.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보내셔서 야곱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백성 된 성도들과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며 환난 가운데서 지켜주신 것처럼,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며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지켜주신다. 때로는 야곱처럼 약한 마음으로 절망감에 빠질 때도 있고, 때로는 죄 된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인생걸음을 지켜주시고, 인생길을 인도해 가신다.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이 추어야 할 춤은 이런 의미에서의 마하나임의 춤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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