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34;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 6장 4-7절 )
4절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절에서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디르사 같고, 예루살렘 같고, 깃발을 세운 군대와 같다고 하였다. 디르사는 사마리아 동쪽에 있는 성읍으로, ‘기뻐함’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깃발을 세운 군대는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서의 당당한 기상을 나타낸다. 술람미 여인이 고난의 시간을 겪고 나서 주님을 다시 만나,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은 이처럼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고, 세상에 대해 당당해야 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렇지 않다. 돌이켜보면, 한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 문제가 닥치고,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이런저런 문제들 가운데서 살아온 삶이란 생각이 든다.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고 싶지만, 삶이 도무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다. 당당하기는커녕 기 죽을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런 인생 가운데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다. 기쁨이나 평강이나 당당함이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게 나를 사랑하고 돌보고 계신 지를 알게 되면, 웬만한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맡길 줄 알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마음의 근심걱정과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하나님께 맡기니, 평안이 온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문제를 주시며 문제들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시고, 고난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일생을 마치고 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가지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한 가지 대원칙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주인이고 왕이라는 대원칙이다. 이 대원칙이 무너질 때,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나라다.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주님께서 주님의 자리에 계시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감사와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한 삶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시고, 내가 주님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늘 있어야 한다. 무슨 뜻인가? 자기가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자기 멋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으로서 나를 다스려주소서, 주님만이 나의 주님으로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내가 주인 노릇하며 살지 않게 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눅 9:23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런 삶에는 주께서 주시는 참 기쁨과 평안이 자리할 수가 없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묵상을 통해서 마음을 비운다거나, 바위 같이 굳센 의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지고 부서져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철부지 같이 자기가 지 삶의 주인인 것처럼 살다가, 하나님께서 내리치셔서 깨지고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기 정체성이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 사람인지,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래서 육신의 영광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기뻐하게 되고, 땅의 영광보다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영광, 세상의 영광, 땅의 영광은 어떤 것들인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영광이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 그런데 이게 어디 세상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랑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추구하지 말자. 눈에 보이는 외형을 자랑하지 말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육신의 영광, 세상의 영광, 땅의 영광, 보이는 것들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은 썩어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하는 영광은 영원토록 썩지 않는 하늘의 영광이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구한다. 썩어 없어질 육체의 영광을 움켜쥐고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눈에 보이는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는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평안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세상에 대해 당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주께서는 이들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신다(4-7절). 그런데 7절에서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다고 하였다. 주님의 칭찬에 부끄러워 뺨이 석류 같이 붉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목욕하고 나온 암양 같이 깨끗하다고 하시지만(6절), 우리는 여전히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당당하고, 주님 앞에서는 언제나 부끄러운 자들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