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9;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 5장 6-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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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9;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 5장 6-7절 )

일요시사 0 1371 0 0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어느 금요일 저녁에 시드니로 가신 권사님 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권사님 상태를 물어보았다. 권사님이 금요일부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셔서 얼마 못 사실 것 같다고 한다. 평소에도 통증 없이 평안한 가운데 주님 곁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오던 차라, 통증은 심하지 않으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통증 때문에 모르핀을 맞고 계신데, 오늘은 약 기운 때문인지 잠만 주무신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모르핀을 맞으셔도 식사도 좀 하시고, 말도 잘 하셨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주무시는 모습이 아무래도 곧 가실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권사님이 천국 가기 전에 목사님과 통화를 꼭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통화도 못하실 것 같아서 대신 감사전화를 드린다고,,, 천국 가시면서도 못난 목사를 생각해주시는 권사님 마음에 가슴이 찡 했다. 


“마음이 힘들고 슬프시겠지만, 너무 슬퍼만 하지 마세요. 권사님 사시면서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제 다시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애통함도 없는 천국에 가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막연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우리의 본향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에 슬프기만 했었는데, 목사님 말씀 듣고 나니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 천국을 믿으면서도 막연하게 믿었었습니다. 현실만 보고 분주하게 살다 보니, 천국을 보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죽음은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더 좋은 곳 정도가 아니라, 비교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애통함도 없고, 울음도 없고, 아픔도 없는 영원한 천국이 우리가 이주하게 될 최후의 정착지다(계 21:4).


성도들은 이러한 영광의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을 향하여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고전 15:17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하였다. 부활이 없는 믿음, 부활의 소망이 살아있지 않은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부활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 안에서만 우리의 믿음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성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단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한 밤중에 주님을 찾아 나서고 있다. 주님께서 밤이 새도록 이슬을 맞으시며 부르셨지만, 자신의 집에 칩거하며, 침대에 누워있다가 문을 열지 않았던 술람미 여인이다. 술람미 여인은 뒤늦게 문을 열었지만,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자 밤에 주님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술람미 여인의 방황은 성도의 영적 방황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는 가까이 계시기도 하고, 멀리 피하기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늘 성도들 곁에 와 계신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처럼 자신의 집에 칩거하며 안일함의 자리에 누워서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면, 곁에 계신 주님이 어디 멀리 가시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밤길을 헤매는 술람미 여인처럼 영적 방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살아나온 것이다. 성도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무덤과도 같은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로 불려나온 자들이다. 부활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다. 


그런데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는 수족이 묶여있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요 11:44).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부름을 받았지만, 아직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상태다. 얼굴이 수건에 가려져서 부활의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한다. 또 손과 발이 묶여 있어서, 부활의 새 삶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영적 방황의 비참함을 본문 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얻어 터지고, 겉옷이 벗겨졌다. 겉옷을 벗겼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한 밤중에 젊은 여자가 혼자 나와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요즘이 아니라 3000년 전 이야기다. 순찰꾼들과 파수꾼들은 술람미 여인이 창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창녀 주제에 겉옷을 입고 있었다. 창녀라면 창녀답게 속옷만 입고, 어느 정도 피부를 노출시켜야 정상인데 말이다. “창녀면 창녀답게 하고 다녀야지, 꼴에 겉옷을 왜 입고 다니느냐?” 


창녀에게 겉옷이 어울리지 않듯이,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사는 성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겉옷은 입고 있지만, 부활이라는 삶의 옷은 입지 못한 모습이다.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부활을 소유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무덤에 갇혀있는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무덤에서 나왔으나 수족이 묶여 있고, 얼굴이 수건에 싸여 있는 나사로를 보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 부활의 삶이란 주님께서 우리의 수족을 묶고 있는 삶의 끈들을 풀어주시는 삶,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삶이다. 세상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세상이라는 한시적 시공을 뚫을 수 있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비천할 때나, 풍부할 때나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지킬 수 있다는 고백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슈퍼맨처럼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말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다.


바울의 몸은 옥에 갇혀있었으나, 마음까지 죽음의 무덤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은 오히려 주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것이 부활의 겉옷을 입고 사는 삶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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