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7; 주의 동산에 사는 사람들 ( 5장 1절 )

교민뉴스


 

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7; 주의 동산에 사는 사람들 ( 5장 1절 )

일요시사 0 1201 0 0

5장 1절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드디어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들어와 사랑의 첫 관계를 갖는다. 여인의 향기와 달콤함과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함께 기쁨을 누릴 친구들을 자신의 동산에 초대한다. 


왕의 동산에는 왕의 몰약과 향 재료가 가득하고, 왕의 꿀송이와 꿀이 넘쳐나며, 왕의 포도주와 왕의 우유가 풍성하다. 주님의 동산에는 주께서 주시는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고,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달콤함이 있으며, 풍성한 잔치의 기쁨이 있다. 주의 사랑을 받고,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주님 동산의 잔치다. 


주께서는 주의 동산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자 하신다. 주의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잔치가 열리는 곳이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주의 동산으로 초대되어 들어온 성도들이 주와 함께 누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다. 그 동산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마음 가운데 세워진 동산이다.


그렇다. 성도들은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도, 주의 동산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주의 동산은 어두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빛의 동산이고, 죽음의 세상 가운데 세워진 생명의 동산이며, 절망의 세계 가운데 우뚝 선 희망의 동산이다. 주께서 함께 하시는 기쁨의 동산, 샬롬의 동산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어렵다. 아주 어렵다. 왜 그럴까?


앞의 4장 12절에서 왕은 술람미 여인을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고 하였다. 여인의 처녀성에 대한 비유다. 그 동산은 왕만이 열 수 있는 잠근 동산과 같고, 덮은 우물과 같으며, 봉한 샘과 같다. 왕의 사랑을 받은 여인은 왕에게만 자신을 내어준다. 여인의 순결함이란 오직 왕만을 사랑하고, 왕에게만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다. 주님의 동산은 잠근 동산과 같고, 덮은 우물과도 같으며, 봉한 샘과도 같은 것이다.


핵심은 주를 향한 순결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순결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다. 여인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왕께 드렸듯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드리기가 쉽지 않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5장 42절에서 유대인들에게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 5:44).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고, 사람의 영광은 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만이 중요하다.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신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요 5:41). 주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온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 전체 말씀을 말하는 것이고, 강령이라는 말은 원래 ‘매달다, 매달리다’라는 뜻이다. 성경전체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한 말씀에 매달려있다. 성경에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있고, 말씀들이 있지만, 이 모든 말씀의 핵심골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도 크고 첫째 되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이다.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의 순결함을 지켜야 한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헬라어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존재의 가장 중심부를 뜻한다.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부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감성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요지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었던 금송아지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해낸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지 오래 되었는데도 내려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자기들을 인도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모세를 의지하였고, 모세가 보이지 않자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위로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상숭배, 즉 영적 간음의 본질이다. 


송아지는 능력과 다산과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이다. 많이 갖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심을 상징한다. 요약하면 ‘Money, Power, Sex’다. 미국 증권가의 중심인 뉴욕의 월 스트리트에 바로 이 금 송아지가 세워져 있다. 송아지가 아니라 힘 센 버팔로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세계는 돈과 권력과 sex가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송아지는 우상숭배의 원조다. 금송아지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다. 중세교회가 타락한 것도 결국은 금 송아지 때문이었고,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는 것도 금 송아지 때문이다. 


약 4:4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영적 간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다.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딤후 3장 1-5절에서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돈과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자기 자신보다, 돈보다, 세상의 영광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나? 주를 더 사랑할 수 있나? 금 송아지를 얻기 위해 주를 찾고 주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 무릎 꿇지 않는 자 칠천 명을 남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왕상 19:18). 바알은 금 송아지와 상징하는 바가 같다. 금 송아지는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 눈에 보이는 영광이다. 주께서는 보이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주의 동산에 들어와 주와 함께 풍성한 사랑을 나눌 순결한 신부를 찾고 계신다. 주의 동산은 사랑의 순결함을 지키는 ‘남은 자’들의 나라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0 Comments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