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93); 함께 가는 길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93); 함께 가는 길 <디모데후서 4:10~12>

오늘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4장의 거의 끝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하면서 편지의 말미에 몇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세 명의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1절과 12절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누가와 마가와 두기고, 저들은 각자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각자의 성향이 달랐습니다. 주어진 역할과 감당한 사명이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 맡겨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바울에게 있어서 저들 모두가 귀한 동역자였습니다.

  

오늘 제목에 비추어 말씀드리면, 바울과 함께 가는 길에 서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사명 감당하는 자들로,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또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누가가, 마가가, 두기고가 믿음의 인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 끝까지 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함께 가는 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함께 가는 길에 서 있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가는 길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또한 나와 함께 동역하는 성도님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 “누가”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초반부에 보면 바울의 안타까움, 더 나아가 섭섭함까지 느껴집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라는 이름은 성경에 총 세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오늘 디모데후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에 나옵니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처음에 로마에 가택 연금되어 있던 그 때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데마는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제자로서 바울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5년여가 지난 이 때, 바울이 네로의 기독교 박해 때에 다시금 감옥에 갇히게 되자, 데마는 바울을 떠나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레스게와 디도 역시 바울의 곁을 떠나가는데, 이들은 앞선 데마와는 다릅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울 곁을 떠나간 것입니다. 어쨌든 이후에 바울 곁에 누가 남는가? 누가만이 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같이 누구보다 아끼고 애정을 담아 제자로 삼은 디모데도 바울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쓸쓸한 감옥에서 바울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누가뿐이었습니다. 누가는 원래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한 이방인이었는데, 그 “누가”라는 이름 자체의 뜻이 참 귀합니다. “빛을 주는 자”. 누가는 원래 의사였지만, 바울에게 영향을 받아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복음 전도자의 사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때부터 누가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가시, 즉 바울의 지병을 담당한 의사이자 선교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특별히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며 그의 주치의가 되고 친구가 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바울이 당한 많은 고난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고난을 바울만 당했을까요? 함께 동역한 누가도 똑같이 고난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의 길에 바울과 함께 동행 했던 누가는, 마지막 바울이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바울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끝까지 함께 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속회에서, 선교회에서, 또한 뉴질랜드광림의 권속으로서 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 주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끝까지 함께 가는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유익이 되는 사람 “마가”입니다. 


본문 11절에 말씀하죠.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사실 마가는 신앙적인 열심은 있었지만, 온실 속에서 자라난 화초와 같은 연약함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한 1차 전도 여행 때에 동행 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2차 전도여행 때에 바울과 바나바 간에 다툼이 일어나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중도에 포기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여, 결국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바나바와 그렇게 크게 다투면서까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던 마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서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가? / 마가는 본래 예루살렘의 부유한 레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자신의 집을 기도의 장소로 개방했고, 그의 집을 방문한 사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마가의 마음에는 신앙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은 있었지만, 실제적인 삶의 고난을 겪어 보지 않았던 그는 선교에 따르는 어려움을 감내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단함으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귀한 것은 이 마가라는 인물이, 실패하고 또 실패했어도 아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오랜 연단의 기간을 거쳐 다시금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우리가 다 마가와 같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 안에서, 신앙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감사가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세상에만 나아가면 전쟁과도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기쁨 충만, 은혜 충만인데, 세상은 무시가 있고, 조롱이 있고, 다툼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 속에서 어떻습니까? 다 넉넉히 이기고 계신가요? 마가처럼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도망하고 싶기도 하고, 전도여행 중에 포기하고 돌아선 마가와 같은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 아니던가요? 그럼에도 마가는 자신의 나약함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넘어짐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나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에는 “유익이 되는 사람”으로 그의 평가가 바뀌게 됩니다. 

  

함께 가는 길에 서로 손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것, 이를 통해 서로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이 되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간에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가는 길에 서로에게 정말 유익이 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신실한 사람 “두기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기고는 사도행전 20장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 동행한 바울의 제자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디도서에도 그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새교회에도 편지를 썼습니다. 둘 다 옥중서신입니다. 그럼 이 편지를 전할 사람이 필요하죠. 누군가 직접 편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에베소교회를 향해, 골로새교회를 향한 귀한 신앙의 권면이 담긴 서신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인물이 자신의 동역자이자 제자 중에 하나인 두기고였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는 두기고에 대해서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사정을 다 아는 자, 사랑 받는 형제, 진실하고 신실한 자” 이 세 가지 중에 저는 “신실함”을 최고로 뽑았습니다. 왜요? 보십시오. 내 사정을 누구에게 말해줄까요? 신실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여기 저기 아무데나 가서 말하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두기고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정말 진실하고 신실한 사람, 늘 변함없는 모습을 가지고 바울을 따랐기에, 바울은 그에게 모든 사정을 다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포장할 것도, 과장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겁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신실함입니다. 또한 성도님들 간에도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할만한, 신뢰받을만한 모습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실함이 있어야 인간관계도 오래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두기고와 같이 언제나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함께 가는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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