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5;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 4장 12-1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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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5; 잠근 동산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 4장 12-15절 )

일요시사 0 1350 0 0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을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고 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신부는 문이 잠겨있는 동산과 같고, 뚜껑을 덮어놓은 우물과 같고, 비밀스럽게 봉해놓은 샘과 같다,,, 신부의 처녀성을 말하는 것이다. 


신랑만이 신부의 동산 문을 열 수가 있고, 신랑만이 신부의 우물에서 물을 길 수가 있다. 오직 신랑만이 신부의 봉인을 열고 샘에서 물을 얻을 수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신부는 오직 신랑에게만 몸을 주어야 한다. 신랑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간음이다. 신부의 순결을 잃는 것이다.


신부의 처녀성,, 신부의 순결함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의 순결함도 이와 같다. 성도는 영혼의 순결함을 지켜야 한다.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께만 자신을 드려야 한다. 


야고보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하였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야고보서 4장 4절)


세상과 벗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뜻이고,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의지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9,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목이 뻣뻣한 백성,,,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하신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다. 내용은 이렇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올라가 사십일 동안 있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오래 되었는데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해졌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며,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모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기적을 행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세를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세가 보이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서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모세 대신에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금송아지의 정체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어떤 것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 지은 범죄가 바로 우상숭배였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이 두 나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성전은 남쪽의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러자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금 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하나님의 상징으로 섬기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남쪽 유다 백성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알이라는 우상도 함께 섬겼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북 이스라엘 백성이나,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겼던 남쪽 유다 백성이나 본질은 모두 같다. 우상숭배다. 하나님을 부인해서 우상숭배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이 실제로 의지했던 것은 보이는 형상, 우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우상숭배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재물이든, 권력이든, 세속의 쾌락이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현실세계의 그 무엇인가를 더 의지하려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사실은 금송아지를 더 의지했던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목이 뻣뻣한 자들임을 알 수가 있다.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주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몹시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다 부자라서 그렇게 물은 것은 물론 아니다.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신 이유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게 되고, 돈이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연약하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보다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을 더 의지하기가 쉽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늘에 속한 자답게 너희가 속해있는 진짜 나라인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잠시 살다 가는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성도의 실존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는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실존을 알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의 참 소망은 땅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자신의 본향인 하늘에 그들의 소망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어렵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돈을 더 의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더 집착하게 된다.


결국 우리 신앙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서의 영적 전투다. 신앙의 순결을 지킬 것인가, 간음한 여인으로서 살 것인가의 문제다.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어느 신이 자기 사랑하는 자를 위해 위해 죽는단 말인가.. 주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주만을 사랑하며, 순결한 성도의 길을 걷고 싶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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