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그이가 왜 안 오실까 오소영(수필가)
“다 좋은데 아프지만 맙시다.”
그 말이 그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로움을 털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는데….
이제는 ‘왜 안 오실까’하는 기다림도 사라졌다. 뻥 뚫린 가슴 한쪽으로 시린 바람만 밀어닥친다.
그분이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동갑내기 친구 ㅇ옥 씨. 우리는 누구누구의 할머니보다는 서로 정겹게 이름을 불렀다. 어릴 적 친구도 아니면서 ‘씨’ 자를 하나 붙여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러면 마냥 도타운 정이 묻어났다.
이른 새벽, 인적 없는 빈 거리를 가로등 불빛만이 싸늘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우리는 부평역 앞에서 만났다. 혼자 외롭게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먼저 온 몇 사람이 아는 체를 해주었다. 동행할 일행이 다 탈 때까지 기다리며 버스에 있던 그들과 첫 대면의 인사를 나누었다.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허물없는 사이의 사람들 같아 주춤거렸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친목 단체여행이라더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이십여 명이 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나와 꼭 함께하고 싶어 했던 ㅇ옥 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각자 제 기분에 겨워 떠들어대는 여인들의 대화가 거침이 없었다. 다듬지 않고 나오는 투박한 말들이 나 같은 손님을 오히려 편안케 해주었다. 일탈의 설렘에 조이고 살았던 나사가 마냥 헐거워진 모습이었다.
차가 얼마만큼 달리기 시작하자 아침 식사로 떡 봉지가 돌려졌다. 아~그 떡. 지금 생각해도 다시 먹고 싶은 그 묘한 맛. 잊히지 않는다. 손바닥 안에 꽉 차는 큼지막하게 빚은 시퍼런 송편, 모양을 내지 않고 쉽게 빚은 솜씨의 것처럼 생김은 좀 그랬다.
한입 베어 물었더니 유난스레 쫄깃한 질감. 형용할 수 없는 은근한 향기가 입안에 맴돌았다. 단단히 주물러서 소를 넣은 동부의 맛과 어울려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쑥떡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이게 뭘까. 촌스럽게 물어보기도 뭣해 그냥 꾸역꾸역 먹기만 했다.
“보기보다는 맛있죠? 쑥떡이 아니에요. 참 요즘 인기 있는 모시떡을 모르시지.”
모시떡이라니. 뉴질랜드에서 온 사람이 당연히 처음인 걸 잘 안다는 듯 자랑처럼 말해주는 ㅇ옥 씨. 빳빳하게 푸새해서 정성 들여 다리면 잠자리 날개처럼 우아했던 고급 옷감 여름 모시, 그 모시잎이란다.
모시옷을 떠올리면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어느 여름날, 내 집에 찾아오신 손님을 맞으러 대문을 열었을 때다. 모시 한복을 날아갈 듯 차려입으신 친정아버지의 환한 모습. 여름 중절모에 단장까지 챙겨서 문밖에 서 계셨다. 하얗게 눈이 부셔서 딸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셨던 아버지. 그때가 딸의 집을 방문하셨던 마지막이라 더더욱 잊히지 않는다.
화학섬유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든 모시가 이젠 떡으로 둔갑해 그 고장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고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여행 첫날 밤, 넓은 모텔 방에서 합숙을 했다. 샤워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난 깜짝 놀랐다. 웬 민머리 스님이 속옷 차림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주춤하는 나를 보고 ㅇ옥 씨가 옆에서 쿡 찔렀다. 그는 함께 온 일행 중 한 분이었다. 여인의 화장대 위에는 물기에 젖은 동그란 가발이 무엇엔가 얹혀 있었다. 곧 상황을 눈치챘다. 나는 민망해서 눈 돌릴 곳을 찾아야 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저리도 편한 것을 보면 방 안의 사람들은 이미 가족 그 이상임을 알아야 했다.
졸지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란다. 얼마나 아팠으면 머리털이 저리 다 빠져버렸을까. 회오리처럼 지나간 몇 해 전의 아픔도 이젠 세월이란 강물을 따라 흘려보냈는지…. 그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해 주었을 친구들이 대견하고 훌륭했다. 여인의 태연한 태도가 그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몇 차례 더 그들과 동행할 기회가 있었다. 깍듯하게 나를 특별손님으로 대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게 모두 ㅇ옥 씨의 덕분이었기에 그의 인간성을 다시 한번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날 스파의 물은 유난히 따뜻했다,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은 물이 더 따뜻한 것 같아 너무 좋다.”
갑자기 우리말이 들려서 나도 모르게 퍼뜩 눈이 떠졌다, 순간적으로 한국인 줄 착각을 했다. 낯선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고, 반가워라. 한국 분이시죠?”
우리는 수영복 차림으로 만나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알고 보니 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분이었다. 외손녀까지 다섯 손자의 유학 뒷바라지를 맡아 비행기를 타고 오신 대단한 할머니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우리도 이런저런 노인들 모임에 나갔다. 인품이 고와 금방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가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푸짐한 밥상을 내놓는 게 그분의 특기였다. 한국 대가족의 전형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따뜻하고 정겨운 가정이었다. 요즘 보기 드문 색다른 분위기에 존경심마저 생겼다.
만두를 했다고 부르고, 바비큐 한다며 불러줘서 가족처럼 식탁에 둘러앉기가 일쑤였다.
죽이 잘 맞아서 종종 외출도 함께 했다. 이웃에 친구가 없던 내게 더할 수 없는 좋은 벗이 되었다.
나중에 남편도 오셨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그분 덕에 싱싱한 회도 많이 먹었다. 가장의 인심이 그러하니 온 가족이 다 너그럽고 따뜻한 품성인 걸 알게 되었다. 요즘 핵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으로 남으랄 데 없는 모범 가정이었다.
일 년을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ㅇ옥 씨가 내게 주고 간 선물이 있었다. 자기 보듯 하라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서 내게 끼워줬다. 제법 값이 나가는 반지였다. ‘우리 드라마 찍냐’고 낄낄거리며 함께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마음이 짠했다. 그의 속 깊은 정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내가 고국 방문을 하면 그의 집에서 며칠은 함께 지내고 와야 했다. 부부가 함께 반가워해 줘서 꼭 해야만 하는 절차였다. 아내가 여행을 갈 때면 남편이 먼저 서두른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을 찾아 손에 들려주는 남편을 보면서 ‘ㅇ옥 씨는 참으로 복도 많구나’ 하며 부럽기만 했다.
무척이나 단단하고 건강하시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다니느라 연락도 못 했네요.”
서러움과 외로움이 겹쳐서 못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넓은 빈집이 허전해서 싫다며 자기 집에 와서 단 며칠이라도 같이 지내자고 했다. 어림없는 보챔인 줄 알기에 안타깝기만 했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다. 추운 겨울이면 지병이 견디기 힘들어 어려움을 겪는 걸 잘 알기에 어서 계절이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그 봄날이 왔다가 여름으로 바뀌고, 또 겨울이 왔다. 그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무슨 일로 못 오시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가 그리워지면 손가락에 반지만 무심히 들여다봤다.
이젠 내가 가고 싶어도 그가 오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하늘길이 막혀 버릴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가끔 목소리를 들으며 안부를 묻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나 자주 연락 못 해도 그대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까 오해는 하지 맙시다. ㅎㅎㅎ.”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봐요.”
“나 돈 벌어요. 글쎄 아파트 뒷동에 사시는 아흔셋 되신 할머니와 놀아만 주는데 한 달에 ㅇㅇ만 원을 정부에서 준다고요.”
가진 재산도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욕심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도 남는다. 혼자인 사람끼리 심심함을 달래주는 것도 좋은데 보수까지 있다니 재미를 붙일 만도 했다.
“다 좋은데 아프지만 맙시다.”
그 말이 그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로움을 털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가지도 못하니 연락도 조금 멀어졌던 것 같다. 그 번거로움 속에서 세상을 하직한 안타까운 부음을 뒤늦게야 들었다. 벌써 두어 달 전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동갑내기 친구, 정말 좋은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에 가슴이 떨렸다.
코로나 록다운에 걸려 어머니 장례에도 참석을 못한 큰아들의 슬픔은 또 얼마나 컸을까?
이제는 ‘왜 안 오실까’하는 기다림도 사라졌다. 뻥 뚫린 가슴 한쪽으로 시린 바람만 밀어닥친다.
“친구야! 서둘러 영감님 곁에 가시니 좋으신감. 편히 쉬소서….”
뒤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