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69);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도행전 2:1~13>
우리는 지난 몇 달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시간들을 지내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코비드19”.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시작되어 2월 3월에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또 제2의, 제3의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전망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새벽에 교회를 위해서,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에 이러한 기도가 나옵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죄악으로 인해 패망의 길로 가고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금 회복의 역사에 이를 것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회복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공로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주심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에, 주의 긍휼하심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은혜를 내 마음에 새기고, 또한 주의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이, 우리의 삶이 새겨지는 이 시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 그 첫 번째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 더러운 짐을 다 벗겨주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요? 삶의 고달픔? 건강의 어려움? 경제적인 문제? 그 모든 것 이전에 먼저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은 죄악의 짐입니다. 세상에서 짊어진 죄악의 짐을 벗어버릴 때에, 비로소 주의 평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가르키는 “헐고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이 왜 이스라엘 헐고 황폐하게 만들었나요? 이스라엘이 범한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서 그 모든 어려움과 문제거리들이 떠나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죄악의 짐을 벗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를 저질렀을 때에, 회개함으로 올려드린 시편 51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죄의 짐을 벗어야,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는 전혀 고통 없이,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달콤하게 우리 안에 들어와, 마치 제 집인 양 자리를 잡습니다. 하지만 그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죄 값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죄의 짐을 벗겨주시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손을 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단 죄의 고름을 짜내면 건강이 회복됩니다. 흙탕물에 곤죽이 된 옷을 벗으면 몸이 깨끗해집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의 가장 큰 은혜, 그 출발은 십자가 죄 사함으로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내 모든 죄악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정결함으로 주의 품에 안기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소망으로 내일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한 문장의 말씀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말씀하길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이건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기억함으로, 앞으로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오늘이 있습니까? 현재가 있습니까? 오늘, 현재, 지금 이 순간은 없습니다. 지난 날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내일에 대한 소망은 있는데, 지금 현재의 모습은 없습니다. 물론 본문 내에서 현재의 모습은 나라가 망하여 포로된 현실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현실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에 묶여 무너지지 말라는 거죠. 지금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낙심치 말라는 겁니다.
우리도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파도가 우리 앞에 넘실댑니다. 본문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포로기 현실과도 같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 가운데, 저들은 예배도 마음껏 드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포로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삶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 현실의 아픔 자체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그 흔한 “힘들지?”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장의 어려움은 아예 생각도 말고, 저 앞에 예비되어진 소망의 내일만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기반은 과거에 도움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입니다.
지난 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저들에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은혜의 때에 응답해 주셨고, 구원의 날에 도와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너희들도 이제 지나간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지금 현재의 아픔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아픔에 묶이지 말고, 아니, 아예 쳐다 보지도 말고, 예비된 축복의 순간만 바라보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아주셨기에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더라구요. 그리고 이러한 은혜의 체험과 믿음의 고백이 있는 자, 지금 당장의 고난의 현실을 넘어 내일을 향한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손으로 붙드신 지난 날의 모든 삶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아픔의 순간에 나를 붙잡아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위에 내일의 소망을 그리고, 그 소망이 내 삶의 열매로 맺혀지는 복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풍요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마치 선한목자를 따르는 양에게 푸른 풀밭, 맑은 시내가 예비되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풍요의 길이 예비되어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말씀이 본문 9절 중반에서 10절까지 말씀을 잘 보십시오. “길에서도 먹습니다.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기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저들의 걸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지금 산을 걸어가는 겁니다. 지금 더위와 볕이 뜨거운 그 아래를 걸어가는 겁니다. 푸른 초장을 걷는 게 아니죠. 그늘 속에서 시원하게 걷는 걸음이 아닌 겁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배부르게 먹습니다. 저들은 상함이 없습니다. 왜요? “길에서도 먹을 것을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헐벗은 산에도 그들에게만은 예비된 풀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어진 환경은 길이고, 산이고, 더위고, 햇빛 아래의 뜨거움인데, 실제적인 모습은 먹고 마시고, 평안함 가운데 거합니다. 그리고 결국 저들의 걸음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저들이 삼일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갈 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셨습니다. 빨리 물을 줘서 갈증을 해갈시켜주시고 싶지만, 그 전에 저들의 광야의 삶을 위해 훈련을 시키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 하시고,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알려 주시고, 비로소 물샘 열 둘과 종려 나무 일흔그루를 만나는 엘림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우리의 걸음이 지금 어디를 걷고 있습니까? 또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걸음은 광야 사막 길일지도 모릅니다. 햇볕 아래 뜨거움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붙잡고 걸어갈 때에, 결국에는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 일흔그루를 만나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걸음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샘물 근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찬양하는 거예요. 13절입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감사와 영광의 찬양이 넘쳐흐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