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49)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9:9~13>
2023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의 첫 번째 주일, 우리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로 예배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절기입니다.대림절은 성탄절 앞에 있는 네 번의 주일을 뜻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이렇게 교회 강단에 촛대를 놓고 불을 밝힙니다. 대림절 첫 주에 하나, 둘째 주에 둘, 셋째 주에 셋, 넷째 주에 넷, 그리고 성탄절이 되면, 가운데 있는 붉은 색 초에 불을 밝힙니다.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다림과 소망, 회개와 평화, 사랑과 나눔, 만남과 화해를 그려갑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면, 가운데 붉은 색 초에 불을 밝힙니다. 대림절의 주인이신,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상징합니다. 매 주 마다 이 초에 하나씩 불을 밝혀가며,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주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모든 중심은 예수님입니다.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내가 직접 만나야만 합니다.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접하는, 그리하여 생명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축복의 주인공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 또한 어떻게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내 삶 속에 계속 누려갈 수 있나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인정하는 자가 부르심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나를 부르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질병을 인정하는 자가 치유를 받을 길이 열려지는 것과 같습니다.타락과 방황과 불신앙의 삶을 살다가 회개하고 돌이켜 위대한 성인으로까지 불리우게 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합니다. “최고의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마태가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보십시오. 이게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절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더 말이 안되는 것은 마태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이 당시 죄인들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세리를 제자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의 정점에 선 분이, 죄인 중에 죄인을 부르신 사건이기에 충격입니다.
사실 마태는 오늘 예수님을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향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라는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감히 예수님께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예수님은 이미 마태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죄인된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나서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태를 부르신 겁니다. “나를 따라오라.”
세리는 공공연하게 죄인이라 인정받았고, 저들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쳤기에 죄인입니다. 게다가 저들은 정해진 세금 이상의 것을 징수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기에 명백한 죄인이었습니다.그런데 도리어 이 사실이 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제일 힘든 사람 중에 하나가, 소위 괜찮은 사람입니다.교회는안다니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더 세상에서 존경받고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의로우니까주님을 만날 필요도 없는 거예요.오늘 바리새인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그렇기에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새인은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났으나 만나지 못합니다. 인정하는 자가 부르심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나의 죄악됨을 인정하는 자,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을 주님 앞에 내어놓는 자,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 주시는 영적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는 축복의 주인공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정결하게 합니다.
기독교 초기에 제롬이라는 성서학자가 있었습니다. 제롬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사람입니다.그날도 제롬은 예루살렘에서 성경번역에 열심을 내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롬은 너무 반갑고 놀라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주님! 이렇게 부족한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안되는 돈이라도 드릴까요?”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제롬! 다 필요 없다. 정말 네가 그렇게 나를 기쁘게 하는 선물을 주고 싶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죄악의 보따리를 내게로 가져오라.” 이 후 제롬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때까지 제롬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성경을 번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고 은근히 자부했습니다. 이만하면 당당히 예수님 앞에서 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정결함은 내 의로움을 가지고 이룰 수 없습니다.우리의 거룩함은 나의 열심 가지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따라서 이 모든 것의 출발이 예수님의 오심입니다.멸망이 아닌 영생으로 가는 길은 죄 사함을 통한 정결함의 은혜 뿐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가요?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은 내 것을 너에게 주는 것, 아낌없이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그것을 넘어서서 같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사랑이요, 가장 완전한 사랑입니다.예수님은 하늘 보좌, 완전한 의로움의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자리로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죄인으로, 의인으로, 같아지신 사랑, 이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입니다.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 정결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부합니다.하지만 그럴수록 저들은 점점 더 정결함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내 의로움이 나를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나의 윤리적인 생각, 도덕적인 행위가 나를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와 같아지신 그 사랑만이 나를 정결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크신 사랑으로 정결함의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예전에 혹시 기억나시나요?김국환이라는 가수가 ‘타타타’라는 노래입니다.“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우리도 내 앞길을 알 수 없습니다. 금년 2023년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 우리가 남은 한 해를 어떤 마음과 몸가짐으로 마치게 될지, 또 다가오는 2024년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 다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세아 6장 3절에는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자고 권고합니다.호세아 활동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지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이 똑같습니다.열심히 예배를 드립니다.하지만 이 안에는 예배의 참된 의미가 빠져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인가요?죄로 인해 단절된, 불화하게 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그렇기에 양을 잡아서, 염소를 잡아서, 비둘기를 잡아서, 그 제물에 안수하고 내 죄를 그 제물에 뒤집어 씌우고 잡아 죽여 희생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드립니다. 그러면서 내 죄의 용서함을 받는 거예요. 이를 통해 내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 예배에 담긴 기본적인 의미입니다.그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할 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나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고 계신지요? 주일이니까 예배하고 있나요?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있기에, 죄인된 우리들이 주님 앞에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요,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음 그 자체가 너무나도 큰 은혜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만을 높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영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고, 매 순간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예배마다 ‘나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