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5 ;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1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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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5 ;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1장 7절)

일요시사 0 1126 0 0

행복지상주의,,, 우리가 사는 목적, 인생의 목적이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인가? 맞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 행복이 어떤 행복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은 주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주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 내 생명의 주인도 주님이시고, 내 인생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신자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다. 달리 표현하면, 주님께 종속된 사람이다. 주님께 속한 자라고 하면 듣기 좋은데, 주님께 종속된 자라고 하면 듣기에 불편하지 않으신가? 같은 뜻이라도, 표현하기에 따라 좋게 들리기도 하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한다. 

 

오늘날 행복지상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단순히 행복 자체가 목적이 되면, 주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되기 쉽다. 그 결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주님은 나에게 종속된 분이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아주 좋은 분이 되는 것이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요정 지니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르면 나와서 구해주고,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는 그런 요정이다. 지니는 주인의 소원을 다 들어준다. 그 소원이 옳은 소원이건, 자기 욕심에서 나온 소원이건, 다 해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 지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지만, 주인은 아니다.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종이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신다. 옳고 그름을 따지신다.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고난도 주시고, 질병도 주신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침묵하실 때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은 높아지고 싶어하는데, 낮아지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대접을 받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데,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저것 간섭하시고, 참견하시고, 세상욕심을 죽이라고 하신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불러내면 나타나는 분도 아니고, 원한다고 다 주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것도 내 기준이 아니라, 주님 기준으로 그렇게 하신다. 

 

지니와는 너무 다르다. 지니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를 섬기는 신이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이 지니처럼 여겨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을 높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존재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일을 하신다. 

 

잘못된 행복지상주의는 주님을 지니로 만들고 있다. 지니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신이 아니라, 편안하게 해주는 신이다. 따지고 간섭하고 귀찮게 하는 신이 아니라, 나 좋은 대로 살게 내버려 둔다. 게다가 우리가 필요할 때 불러내면 나와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신이다. 

 

그러나,,, 지니가 주는 부와 행복에는 사랑도 없고, 생명도 없다. 그 행복은 오히려 영혼을 죽이는 독이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광풍과 사나운 파도를 잠잠케 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지만, 가장 무능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주님께서는 나의 종이 아니라, 나를 위해 종보다 더 비천하게 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술람미 여인은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외치며 솔로몬 왕을 찾아 나섰다. 왕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찾아나선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또는 무엇이 필요해서 왕을 찾아나선 것이 아니다. 왕의 사랑을 알기에, 왕을 너무 사랑하기에 찾아나선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왕을 불렀다.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말은 보통 사용하는 마음하고는 다른 단어다.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말인데, 생명, 영혼이라는 뜻이다. 술람미 여인의 고백은 “내 생명, 내 영혼, 내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여기서 ‘내 영혼’이라는 말이 술람미 여인의 고백에서 나오는 ‘내 마음’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다. 주님을 찾는 갈급한 심령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나,,,

 

술람미 여인의 외침은 온 몸에서 토해져 나오는 간절하고 갈급한 사랑의 부르짖음이다. 주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주의 사랑을 아는 자는 술람미 여인처럼 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도 있을 수 없다. 알라딘 램프의 요정같이 나의 소원을 다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때로는 원하지 않는 고난을 주실지라도,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양들을)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고 말한다. 왕에 대한 간절한 사랑으로 왕이 양 치는 곳과 양들을 쉬게 하는 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 목동도 아니고, 무슨 양을 치나? 우리의 왕이시고, 목자이신 주님 을 찾고 있는 것이다. 목자가 양떼를 먹이는 곳은 어디인가? 좋은 풀과 샘물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신령한 양식과 생명의 샘물이 있는 곳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3).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갈급한 사랑의 심령으로 주님을 찾아 나서자. 그리고 그분을 만나자. 그분 안에서 우리의 지친 영혼에 생기가 돌고, 마음은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린다. 

 

술람미 여인은 7절 하반부에서, “내가 네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같이 되랴”라고 말한다. 내가 얼굴을 가린 자같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술람미 여자는 자신의 검은 피부를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때론 검은 죄가 부끄러울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만나자. 더욱 갈급하고 간절한 심령으로 주님을 만나자. 나 비록 부끄러울지라도,, 나를 맞아주시고, 은혜로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나자. 

 

그리스도인들이 구해야 할 행복은 이런 행복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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