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49);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41:38~45>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장면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 세 단계로 구분이 됩니다. 첫 번째는 17세까지로 요셉이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17세부터 30세까지입니다. 이때는 요셉의 고난의 시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오늘 본 본문의 말씀대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시기입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요셉의 삶은 두 번째 단계, 즉 고난의 시기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영광스러운 축복을 받는 부분이지요. 그런데 왜 고난의 때를 말씀드리고자 하는가? 본문은 축복의 내용인데, 말씀은 왜 고난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요셉의 축복이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시기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만을 의지하고, 또한 주의 도우심 가운데 있었기에 그의 삶이 복된 삶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오늘 요셉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 땅의 삶, 우리 자녀손들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고난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에게는 가정에서 아주 큰 사랑을 받던 행복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베푼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시기는 오히려 요셉에게 독이 되어서 요셉을 고난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반면 요셉의 고난의 시기는 오히려 요셉을 축복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행복이 고난을 낳고, 고난이 축복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있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지금 당장 행복하다고 그게 끝이 아니고, 지금 당장 힘들다고 그것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늘 고난과 행복이 챗바퀴 돌듯이 반복되는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요셉이 누린 행복은 다시 고난의 길로 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아니 죽어서 그 후손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누렸던 복과 30세 이후에 누린 복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가정 가운데서 누렸던 요셉의 복은 누가 준 복입니까? 사람이 허락한 복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만들어준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시절 이후에 누린 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해 광야의 길, 고난의 길을 허락하십니다. 야곱이 요셉을 열심히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우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손에서 요셉을 뺏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간 애 하나 다 망치겠다.” 그러면서 고난의 길에 넣어서 인물을 만드시는 겁니다. 야곱의 방식으로, 사람의 방식으로 그렇게 계속 키웠다면 요셉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바보가 되었을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고난으로 단련시키신 후에 인물을 만드십니다. 고난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고난 중에도 감사함으로 그 고난을 영적 진보의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시고 인물로 만드시는 과정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고난 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요셉의 고난의 삶을 자세히 한 번 보겠습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의 순간 중에 가장 힘겨웠을 때가 언제였을까? 제 생각에는 아마도 감옥에 있었던 시간, 그 중에서도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내가 곧 풀려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았던 2년간의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 관원의 꿈을 해석하고 만 이년을 감옥에서 더 지냈다고 말씀합니다.
그 2년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며칠 동안은 자신이 금방 풀려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살았을 것이고, 또 얼마 동안은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 하는 의구심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포기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앞서 일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2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은 모든 상황들을 준비하십니다. 요셉이 겪고 있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그 고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울 계획을 다 짜고,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간의 고난의 기간이 있었고, 그 고난의 기간들을 통해 충분히 훈련받았고,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담금질 하는 기간이 그 2년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기간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고,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무의미한 시간 같아도, 기도 응답이 더딘 것 같아도,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 앞서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바쁘셨겠습니까? 구덩이에서 물 빼내랴, 노예상인들 그 쪽으로 지나가게 하랴, 보디발 장군이 노예를 사게 하랴, 두 관원장이 왕에게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게 하랴, 그들 꿈꾸게 하랴. 바로 꿈꾸게 하랴. 하나님은 계속 앞서서 바쁘게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요셉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열 네장에 걸쳐서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에게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보면 요셉이 직접 한 말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많이 말을 한 때가 꿈을 해석해 줄 때였습니다. 한 군데만 보면 창세기 41장 16절에 바로의 꿈을 해석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이 한 일은 다만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렸을 때도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죄악된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감옥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애굽왕 바로 앞에 서서도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했고,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고백만을 올려드립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주님 인도하시는 그 길로 걸어가다보니, 어느새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세우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나아갑니다. 그곳이 웅덩이여도, 그곳이 노예의 자리여도, 그곳이 감옥일지라도, 이미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게 됩니다. 우리의 걸음도 이러한 걸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면 모든 게 바뀌어집니다.
요즘 불경기라고 합니다. 한국도 불경기인데, 뉴질랜드도 다를 게 없습니다. 불경기라는 말을 어디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요셉의 시대에도 불경기가 임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불경기였습니다. 당시에는 경제가 아니라 흉년이 지속되면 불경기입니다. 그런데 7년 동안 흉년이 지속되었으니 얼마나 극심한 불경기입니까? 창세기 41장 57절에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흉년, 기근, 당장 먹고 사는 식량부족의 문제가 온 세상에 가득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애굽만은 그 속에서도 풍족함을 누립니다. 왜?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준비하심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도 주님이 분명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어려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본질을 붙잡게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경기가 힘들면 돈 쓰는 데를 줄이죠. 줄이고 줄이고, 가장 중요한 것만 남깁니다. 배가 파선되어서 침몰의 위기가 오면 필요 없는 것들부터 바다에 던져버리고 정말 중요한 것만 마지막까지 남깁니다. 그럼 정말 힘겹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있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만을 붙잡는 그 간절함인 줄 믿습니다. 다 버려도 그거 하나만 붙잡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다 해보겠다는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바라보는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안됩니다. 그건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고, 이제는 뭔가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걸 다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게 다가 되지만, 내 손에 채워주실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더 큰 것을 누리게 됩니다. 내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 그게 끝이고, 그 손에 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더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삶은,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고 요셉은 그저 믿음으로 뒤따라간 것입니다. 자기 힘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높이고,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요셉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