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8; 문을 두드리는 소리 ( 5장 2-6절 )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술람미 여인은 말한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술람미 여인은 잠이 들었어도 마음은 깨어 있어서, 왕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잠이 들어도 마음은 깨어 주님의 소리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경우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음성이 귀에 직접 들렸던 것일까?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자신을 향하신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듣는다. 설교를 들으면서 듣는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듣는다.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성경도 안 읽고, 묵상도 하지 않고,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도 하지 않고, 설교에만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는 자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또,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하, 말씀 좋다” 아무리 감탄을 해도, 그 말씀 가운데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헛되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계속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될 때, 그 말씀은 자신에게 살아있는 주님의 음성이 된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마음은 깨어 있어서 왕의 부르는 음성은 들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계속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시며, 문을 열어달라고 애절하게 말씀하신다.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문에 빗장이 걸려있는 것이다. 마음은 깨어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지만, 마음의 빗장은 아직 풀지 못한 상태다. 주님의 음성은 듣지만,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드리지 못하고, 문 밖에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2절)
비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주님께서는 밤이슬이 머리에 가득하였다. 밤새 이슬을 맞으며,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한 밤중에 찾아오신 주님을 문도 열어주지 않고 밤 이슬이나 맞게 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무례하고, 주님을 막 대하는 불손한 성도가 있을 수 있을까?
있다. 바로 우리다. 술람미 여인처럼 자기 집에 칩거하며, 침대에 누워서 마음에 빗장을 걸어 놓고,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문 앞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들으면서도, 침대에 누워서 마음에 빗장을 걸어놓고 있다.
주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고, 주님의 마음과 뜻도 잘 알지만, 여전히 자기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동산은 주님께서 주인이신 주님의 나라다. 그런데, 자기 동산, 자기 집에서 살며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의 자리, 순종의 자리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주여, 주여 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세상에서 사는 경우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불러주셨다. 성도는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다. 이런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마음이 깨어 있고, 주님의 음성도 듣고, 주님의 사랑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도 잘 안다.
그런데 자기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를 않는다. 지독한 고집이다. 침대는 안일의 자리다. 안일함과 나태함의 자리에 누워 은혜를 누릴 줄만 알지, 은혜에 대한 반응이 없다.
안일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안일함과 나태함의 침대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성도는 주님 달리신 은혜의 십자가를 바라만 보는 자가 아니다. 성도는 주님 달리신 은혜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며, 주님과 함께 죽은 자고 함께 새롭게 살아난 사람들이다. 십자가를 바라만 보며 구원의 은혜를 찬양만 하는 자가 아니다. 십자가의 자리에 주님과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다.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는 자신이 죽는 자리다. 진정으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리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자리, 골고다 언덕을 향해 죽음의 길로 가시는 날, 밤 이슬을 맞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우리도 자기 의지만으로는 결코 십자가의 자리로 갈 수 없다. 주님의 그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밤새 이슬을 맞으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서 계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슬을 맞으시며, 땀에 피가 배어나는 기도를 하셨던 주님이시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이시다.
겟세마네의 주님께서는 지금도 밤 이슬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밤 이슬이 머리에 가득하도록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