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24편] 경계선
일요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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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 11:40
피터 씨. 저와 함께 애인처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있는 것 부인이 알면 괜찮겠어요? 호호
하하, 써니 씨는 농담도 잘하는군요. 당장 짐 싸 들고 쫓겨날걸요. 뉴질랜드, 여자들 무서워요.
경계선을 넘어섰다가는 국물도 없어요. 저야 지금 영업상이지만, 조금만 감성에 기울면 그대로 아웃이지요.
호호. 피터 씨 이야기가 참 재밌어요. 여자들 직감은 무섭지요.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요.
중년 여성이 스카이타워 앞에서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요?
“예, 무리와이비치로 가 주세요.”
운전사 피터의 귀에 들어온 아시안 억양의 목소리. 꽤 낯익은 톤이다. ‘혹시 한국 사람?’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피터는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곧바로 택시를 몰아 홉슨 스트리로 해서 노스웨스턴 모터웨이로 진입했다. 최고속도 100킬로로 쭉 달렸다.
아침나절 10시쯤부터 12시까지는 소강상태인 택시 영업시간에 오늘은 장거리 손님을 만났다. 사뭇 느긋한 마음으로 피터는 최대한 편안하게 택시를 몰았다. 먼저 손님이 다음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손님 모드에 맞춰 운전해주는 운전자의 배려에 여성도 다소 마음을 놓은 듯했다. 여성은 운전석 뒷자리에 앉은 채 창밖만 응시했다. ‘웬일로 무리와이 비치까지 가자고 한 걸까? 거기가 목적지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오클랜드에 사는 이 같지도 않고. 어디서 여행 온 걸까?’ 피터의 직감은 여러 상황을 클릭해 나갔다.
“저기, 기사님! 한국 분 맞지요?”
“예? 네. 맞습니다.”
“오늘 몇 시까지 일하세요?
“저녁 6시 시쯤이면 끝나거든요.”
“그러면 지금부터 그때까지 보통 얼마나 버세요?”
“그거야 운수에 달렸지요. 운수 좋은 날은 $400도 하지만, 못한 날은 $200도 못해요.”
“좋아요. 기사님, 오늘은 운수 좋은 날 될 거예요. 편하게 미타 꺼 주실래요? 제가 무척 힘들어서 멀리 바닷바람 쐬려고 일부러 아저씨 택시 탔거든요.”
“아, 그러세요? 이것도 인연인데 잘 모셔야겠네요. 고국 분을 만났으니 반갑기도 하고요. 최대한 쾌적하게 안내 운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기사님 마음대로 편안히 운전하세요. 커피 한 잔 하게 가시다 근사한 카페에 들러주세요.”
피터가 쿠미우 기차 카페 앞에 택시를 세웠다. 옛날 기차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가 연못가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옛날이야기라도 털어놓을 것 같은 이국적이고 운치 있는 분위기에 여성도 흐뭇한 얼굴로 환해졌다. 연못이 바라다보이는 자리에 여성이 앉았다. 피터가 그 앞 좌석에 자리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롱블랙 플리즈. 여성의 꽤 세련된 영어 발음에 피터가 깜짝 놀랐다. 미투 플리즈! 피터의 맞장구에 여성이 싱긋 웃었다. 저, 써니라고해요. 전, 피터입니다. 써니와 피터! 뭐 좀 만들 것 같은 운율이 둘 사이를 무장 해제시켰다. 피터는 써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쿨하고 심플해서 흥미가 동했다. 운수 좋은 날. 롱블랙 커피잔을 연거푸 비워나갔다.
“피터 씨. 저, 그제 서울에서 날라왔어요. 말 못 할 일로 머리가 폭발할 듯했거든요. 일단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온 거예요. 배신자에 대한 분노. 치를 떨게 한 사악함. 그대로 거기 있었으면 돌아버렸을 거예요.”
“써니 씨. 잘하신 겁니다. 저도 한때 서울에서 동업자에게 크게 사기당했어요. 살인 아니면 자살 직전까지 갔거든요. 마찬가지였어요. 전 일본 히로시마로 날아갔지요. 원폭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평화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지요. 그 옛날 직장 다닐 때 출장 가서 뭔지 모를 에너지를 얻었던 곳이었거든요. 원폭과 왜놈들한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동포들의 넋과 혼을 위해 기도했던 곳. 딱 일주일. 한국에 갔더니 동업자가 교통사고로 즉사를 당한 거였어요.”
“와, 피터 씨. 대단하네요. 보통사람 같지 않아요. 맞아요. 굳이 내가 다 하려고 하다간 내가 당하지요. 세상이 알아서 처리해줄 때도 있어요. 때를 기다리고, 부글부글 끓는 분노와 원한 쌓인 곳을 일단 벗어나는 일. 오히려 다른 곳에서 딴청부리고 엉뚱한 짓 하는 것. 한마디로 미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민도 왔겠지요. 한국에서 한때 잘 나갔다고 한 게 무슨 소용 있나요? 택시 운전, 한국에서 꿈에도 생각 못 한 일, 지금 오히려 자유롭게 살잖아요. 이처럼 좋은 직업도 있나 싶어요. 오늘만 해도 얼마나 드라마틱한 씬입니까. 훌훌 털고 편하게 사는 게 복입니다. 막히면 죽습니다.”
둘 다 숨김없고 솔직 담백해서 화통했다. 감출 것 없는 날것들의 배출. 옳다고 판단하면 거침없는 질주. 주변 이목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 하지만 세상은 얼마나 그럴듯한 허울로 쌓여있는가? 그 베일을 벗어 던지지 않고는 매어 살거나 끌려다니고 마는 인생 아닌가? 둘은 여러 이야기로 맞장구를 쳤다. 다시 택시에 올라탈 때는 여성의 좌석 위치가 바뀌었다. 여성, 아니 써니는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았다. 써니가 창 유리를 내렸다. 피터도 따라서 했다. 택시는 무리와이비치를 향해 거칠 것 없이 달렸다. 양쪽에서 마파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잔디 깎는 집 앞을 지나면서 신선한 냄새가 코끝에 간질거렸다.
“아, 이 풀 내음~ 정말 상쾌한 맛이네요. 저 언덕에는 양 떼들이 놀고 있군요. 마음이 서서히 풀립니다.”
“다행이네요. 사람에 치이면 자연만 한 위로 힐링제가 없어요. 무리와이는 천혜의 힐링 장소지요.”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지나자, 고향 동네 어귀 같은 구불구불한 언덕배기가 나그네들을 감싸듯 맞이했다. 문명의 도시와는 다르게 외따로 떨어진 곳에 숨어있는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자연은 품이 넓고 편안했다. 드디어 멀리 태즈메이니아 바다가 온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와! 무리와이 비치가 생동감 있게 다가오네요. 정말 멋져요. 5년 전 뉴질랜드에 여행 온 적이 있는데, 유독 무리와이 이곳이 마음에 그렇게 남더라고요.”
“써니 씨. 이곳 무리와이야말로 특별한 곳이지요. 오죽하면 3,000킬로 태즈메이니아 해를 날개 지어 가넷 갈매기들이 찾아오겠어요. 그야말로 세계적인 가넷 갈매기 철새의 도래지지요. 생존과 번식 에너지가 넘쳐나는 곳이라서요. 생활에 지친 자들도 하루 푹 쉬다 가면 에너지를 충전 받아 활력이 솟거든요.”
가넷 갈매기들이 집을 짓고 알을 품는 바위에는 수백 마리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진한 잉크 빛 바다 위에는 무리 지어 군무를 추는 갈매기 떼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 온 세상으로 향하는 바다가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진격해 나갔다. 둘은 전망대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대자연의 에너지에 푹 잠겼다. 파도를 타고 세상 저 멀리 빨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러기를 수없이~
“피터 씨. 저와 함께 애인처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있는 것 부인이 알면 괜찮겠어요? 호호”
“하하, 써니 씨는 농담도 잘하는군요. 당장 짐 싸 들고 쫓겨날걸요. 뉴질랜드, 여자들 무서워요. 경계선을 넘어섰다가는 국물도 없어요. 저야 지금 영업상이지만, 조금만 감성에 기울면 그대로 아웃이지요.”
“호호. 피터 씨 이야기가 참 재밌어요. 여자들 직감은 무섭지요. 아래 바닷가로 내려가요.”
둘은 바닷가에 내려가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모래가 까만색이었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촉촉이 스며들었다. 잔물결이 발목 위로 밀려와 간지럽혔다. 써니가 선글라스를 낀 채 서쪽에 물 들어오는 저녁 기운을 음미하며 그대로 섰다. 배 타고 돌아올 낭군을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린 전설 같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써니를 바라보는 피터도 서서 장승처럼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상 근심 걱정이 다 녹아내렸다. 혼자서는 못 가져볼 시간을 누군가 함께 있으니 가능해졌다. 경계선에 서 있을 때 사람은 에너지가 동(動)하는 것인가. 한편으로 설렘과 기대가 밀물과 썰물처럼 들락거렸다. 바다와 육지, 음과 양, 남자와 여자, 결혼과 이혼, 친구와 원수, 동업과 결별, 성공과 실패, 몸과 맘, 취직과 해고, 원한과 용서, 삶과 죽음…. 온갖 이상 세계와 현실세계가 넘나들었다. 자연 속에 풍경이 되어갔다.
“피터 씨. 인생이란 뭐예요?’
“써니 씨. 같이, 함께, 홀로요.”
“그게 뭐예요?”
“써니 씨. 처음엔 같이 하잖아요. 엄마와 갓난아이 때처럼 같이요. 생각과 행동이 같아져요. 가족은 늘 맘속에 같이 있지요. 나중엔 함께 하지요. 생각과 행동이 달라도요. 결혼도 직장생활도 모임도. 그래도 함께 하지요. 함께는 세상 파도를 타다 떨어지기도 해요. 홀로는 나중에 찾아가는 마지막 여행 같아요. 이런 시간도 함께하며 홀로지요. 인생은 홀로 서기가 될 때 자유로운 것 같아요. 저 새들, 나무들, 파도들, 바위들, 구름과 바람까지도 홀로지요. 때돠고 여건 되면 함께도 되지만 결국은 홀로지요. 저의 결론, ‘인생은 홀로다’입니다. 나이 들수록 혼자 있어보기, 혼자 여행하기, 혼자 즐기기, 자기 존중하기, 남에게 의존 안 하기 등등이지요.”
“피터 씨. 인생 주관이 멋지네요. 함께하다 파산한 터라, 저 역시 홀로 돌아온 거네요. 홀로 있어도 자신을 존중하기. 깊이 공감이 가요.”
무리와이 석양 바다가 지치고 힘든 온 세상을 포근히 안으며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터 얼굴도 써니 얼굴도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어갔다.*
LYNN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