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29) 이상한 나라의 그레이스

교민뉴스


 

글쓰는 사람들(29) 이상한 나라의 그레이스

일요시사 0 717 0 0

<사진: 김인식> 

 

글_아보카도 나무<필명>

 

 

 내 이름은 ‘그레이스(Grace)’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영어 이름은 ‘그레이스’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였다. 영어 이름을 하나씩 만들었다. 이름을 바꾸면 영어도 잘할 것 같아서였다. 

 내 한글 이름은 어머니가 거금을 주고 유명한 작명가에게 가서 지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 이름을 단지 몇 분 만에 지으라니.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직장 동료가 말했다. 

 “그레이스라고 해.”

 그 뒤로 내 이름은 ‘그레이스’가 됐다. 동료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아마도 ‘은혜’라는 뜻으로 ‘그레이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레이스 켈리가 연상된다. 미국의 여배우. 기품 있고 뛰어난 미모와 연기로 인기를 끌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으니 배우로도 충분히 인정받았다. 그 후 모나코 왕비가 됐다. 왕비…. 여자들의 영원한 로망.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도 편안하게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었는데도 영어는 생각만큼 빨리 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민만 가면 영어가 해결될 줄 알았다. 쉽게 키위(영어를 쓰는 유럽 사람)와 친구가 되고 뉴질랜드 사회에 섞일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이민을 온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알게 되었다. 영어는 절대로 자연히 늘지 않는다는 것을. 궁둥이를 붙이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실전에서 자존심을 상해가며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사실 영어보다 내가 더 상처받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문화 차이이다.

 키위와 함께 행사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행사가 끝나고 물컵과 접시 설거지를 했다. 한국에서 하듯이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냈다. 그릇을 하나씩 스펀지로 닦고 흐르는 수돗물에 헹궜다. 비눗기가 없어져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컵은 저절로 마르라고 식기 건조대에 뒤집어 놓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Did you use hot water?”(뜨거운 물로 설거지했니?)

 밖에서 의자 정리를 마치고 들어온 키위 친구가 내게 물었다. ‘무슨 더운물.’ 이해가 잘 안 됐다. ‘더운물을 아껴야지. 설거지하는데 더운물을 펑펑 쓸 수 있나’. 딱 여기까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키위 친구가 싱크대 개수대에 뜨거운 물을 받더니 세제를 풀고 내가 30분 걸려 설거지해 놓은 컵과 접시를 와르르 싱크대 안으로 부었다. 왠지 자존심도 같이 싱크대 안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이민 온지 좀 되는 동생에게 투덜거렸다. 

 “언니! 여기 사람들은 설거지를 손이 델 정도의 뜨거운 물에 세제를 풀어서 해. 헹구지는 않고 티 타월로 말려. 과학적으로도 찬물로 설거지하고 말리지 않는 것보다 훨씬 위생적이래. 세제는 식용 세제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듯해도 뭔지 석연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 그 키위 친구가 설명을 하고 설거지를 다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은 이곳 생활에 많이 익숙해 졌다. 가끔 직장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한다. 키위 동료가 뜨거운 물에 세제를 푼다. 운동화 닦는 솔 같은 것으로 접시를 닦고 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접시를 나에게 건넨다. 나는 뜨거운 물에 따뜻해진 거품 묻은 접시를 조심스럽게 받는다. 티 타월로 닦아서 찬장에 넣는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정말 이 세제를 먹어도 되는 걸까? 내가 컵이나 접시를 쓰게 되면 살짝 수돗물로 한번 헹구게 된다.

 

 한번은 키위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라 싶어서 얼른 “Yes”라고 했다. 그런데 보내온 문자에 가격이 나와 있다. 한 명에 75달러. 선물도 하나 사고 옷도 신경을 써서 입고 갔다. 레스토랑에 가니 전부 백인들이다. 긴장이 된다. ‘괜히 왔나’ 싶기도 하다. 일단 왔으니 용기를 내서 캐롤의 생일파티에 왔다고 말했다.

 다행히 온 사람 중 아는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세 시간 내내 죽자고 그 사람만 붙들고 늘어졌다. 어렸을 때 시장에 가서 길을 잃을까 봐 엄마 치맛자락을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쥐고 다녔다. 딱 그 느낌이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익숙하지 않은 사람 속에서 영어는 더 안 들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영국에서 왔다. 대부분의 친구가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중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람도 몇 명 된다. 영어는 영어인데 영어가 아닌 영어다. 한마디로 죽여주는 악센트다. 대부분의 질문에 모호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시간이 더디게 간다. 생일 축가도 부르고 케이크에 꽂은 촛불도 불었다. 드디어 집에 갈 시간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한 명씩 조용히 레스토랑 계산대로 간다. 뭔가 촉이 온다. 3명쯤 계산대로 가길래 나도 조용히 따라가 본다. 각자 마신 와인 종류와 잔 수를 기억해 내느라고 바쁘다. 예외 없이 자기가 마신 와인과 음식을 각자 계산한다. 한국 같으면 생일인 사람 밥값은 나머지 사람들이 내줄 텐데. 혹은 생일인 사람이 밥값을 낼 텐데. 자기가 먹은 것을 자기가 계산한다. 머리로는 무척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슴은 휑하다.

 아직도 한국에서 산 시간이 뉴질랜드에서 산 시간보다 길다. 뉴질랜드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 조금 더 익숙해지려나. 그때까지 나는 계속 ‘이상한 나라의 그레이스’로 살아야 하나 보다.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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