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9편] 허기(虛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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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9편] 허기(虛飢)

일요시사 1 1379 0 0

가만히 못 사는 성질머리라 이 모임 저 모임에 불나방처럼 쫓아다니느라 바쁘지. 

온갖 분란만 일으키다 결국 타 죽고 말겠어. 남들이 처음엔 혹하다 나중엔 

학을 떼고 멀어져 가니 허기(虛飢)를 느끼는 거야. 

악순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거야. 분수도 모르고. 

초등학교 국어 시간과 산수 시간에 다 배우는 건데.

 

 

 

 “ ‘그 여편네’가 또 발광했구먼. 성질머리 아직도 그대로야. 인생 참 딱하기도 하네”

 

“글쎄, 웬 이간질이 그리 심한지 몰라. ‘외사모’에서 퇴출당했으면 정신 좀 차리나 했더니, 딴 데서 또 그러다니.”

 

평소 말이 없고 차분한 요셉파(A)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착한 성정의 여인이라도 몸서리치는 경험을 겪고 나더니 달라졌다. 아니, 방어 본능이 나온 것이다. 공격본능의 발동은 더뎌도 자기 몸 하나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게 나무 옹이처럼 박혔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 살면서 온갖 볼꼴, 못 볼꼴을 보더니 변하긴 변했다. 요셉파의 말을 듣고 맞장구를 치는 B도 몇 달 전 ‘그 여편네(E)’한데 당한 게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열기가 느껴졌다.

 

“자신을 의식해 달라는 하소연이겠지. 메마른 논바닥처럼 피폐한 마음에 단비를 원하는 모양인데, 지금처럼 저리 남을 헐뜯고 비방하면 더 쩍쩍 갈라질 수밖에. 오클랜드에선 설 곳이 없지. 인생이 불쌍해.”

 

“가만히 못 사는 성질머리라 이 모임 저 모임에 불나방처럼 쫓아다니느라 바쁘지. 온갖 분란만 일으키다 결국 타 죽고 말겠어. 남들이 처음엔 혹하다 나중엔 학을 떼고 멀어져 가니 허기(虛飢)를 느끼는 거야. 악순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거야. 분수도 모르고. 초등학교 국어 시간과 산수 시간에 다 배우는 건데.”

 

요셉파가 롱블랙 커피를 마시며 비 오는 창밖을 지긋이 바라본다. 비에 젖은 겨울이라 집에 있기보다 카페에 나와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앞에 앉은 B도 라떼 커피잔을 감싸고서 똑같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타카푸나 더 커피 클럽(The Coffee Club)에 여인들이 젖은 발걸음으로 하나둘씩 들어선다. 겨울비 내리는 날이면 아지트처럼 모여드는 카페, 이마저도 없다면 겨울나기가 좀 더 을씨년스러울 것 같다.

 

***

 

우연한 기회에 모임 하나 만든 것은 요셉파로부터 비롯되었다. 외국 사람과 사는 여자들의 모임, 줄여서 ‘외사모’라 불렀다. 다국적이라 개인별로 특성이 컸다. 지난달까지 다섯 여자가 멤버였다. ‘무녀’라 일컫는 그 여편네(E)는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어렵사리 그 모임에 끼워준 건데 최근 분란을 일으킨 게 한둘이 아니다. 1년 전만해도‘외사모’가 화기애애했다. 부부간에 모여 저녁도 하고 술도 한 잔씩 했다. 석 달에 한 번씩 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했다. 사람 사는 정을 나누고 좋은 관계를 다져나갔다. 남에게 말 못 하는 어려운 이야기도 툭 터놓고 주고받으며 위안도 받았다. 서로 간의 동료의식이 싹터 끈끈한 사이였다. 문제는 다섯 번째 들어온 E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모임에서 이야기한걸 E가 다른 데 가서 침소봉대해 퍼뜨렸다. 결국엔 외사모 여자들 귀에 악소문이 되어 들려왔다. 학을 뗄 일이었다. 

 

불과 한 달 전에 B에게 졸도할 만큼 충격 준 경우만 봐도 그랬다. E가 B를 불렀다. E가 B와 점심을 먹고 차를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문제 될 게 없었다. E가 넌지시 B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지고서 자기 입맛대로 편집한 게 화근이었다. 당연히 경천지동(驚天地動) 할 문제가 터졌다. 사달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E의 입이 재앙의 원천이었다. 

 

“A 있잖아. 일본 남자와 사는데 밤 생활은 잘하나 걱정되네. 남자가 너무 약해 보여서 맨 날 감질나게 가랑비에 젖다 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글쎄, 외모로만 가지고 어찌 판단하겠어. 마른 장작이 더 화력 셀 수도 있잖아.”

 

이렇게 이야기한걸 E는 집에 가서 노트에 적어뒀다. B가 A를 흉본 이야기로. 어느 날 어디서 이렇게 떠벌렸다고. E는 A를 만나 말을 그럴듯하게 각색해서 옮겼다. 

 

“B가 그러던데, 일본 남자와 사는 A는 밤 생활은 잘하나 걱정된대. 남자가 너무 약해 보여서 맨 날 감질나게 가랑비에 젖다 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나. 마른 장작이 더 화력 셀 수도 있다고 했더니,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대. 불이 일어나려다 그냥 꺼지고 말 거래”

 

이 말을 전해 듣고 A는 B를 만나 상처받은 감정을 거칠게 토해냈다. B는 졸지에 악마로 전락할 지경이었다. 어안이 벙벙해 기도 안 찼다. 그때,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게 있었다. 스마트폰 녹음기를 틀었다. B가 E를 만났을 때, 마침 녹음기능에 관해 이야기 한 게 딱 생각나서였다. 녹음 방법에 대해 E가 B에게 알려주어서 그대로 버튼을 눌러놓은 채 다음 말을 이어갔기 때문에 B와 E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음되어있었다. 집에 와서 확인 후, 지우려다 안 지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누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녹음한 내용을 다 듣고 난 후, A는 단호했다. 일단 B에게 사과하고 바로 ‘외사모’ 단톡방에서 탈퇴했다. 이어서 카톡방에서 E를 차단해 버렸다. 더는 만날 가치가 없는 인간 이하 협잡꾼으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B도 동조하는 결단을 보였다. 똑같이 했다. 그 파장은 C, D한테도 파급되었다. 모두 ‘외사모’ 단톡방에서 탈퇴하고 E를 차단해 버렸다. 동그마니 E만 남겨놓았다. 전화도 수신 거절로 차단해 버렸다. 방어는 냉정했다. 그뿐이었다. 그 뒤로 단체 연락이 사라졌다. 자연스레 모임이 해체되었다. E가 나중에 이를 알고 어땠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외 딴 곳에서 막차는 떠나가 버렸고, 비바람은 세차게 퍼부었고, 우산마저 뒤집혀 날아가 버렸다.

 

몇 달 전, “한 말씀만 하소서”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의 설교가 A 가슴에 쩡쩡 울렸다. 아주 똑 부러지게 말해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한국에서 오클랜드에 있는 교민 교회에 부임하려니 마음에 기대와 걱정이 앞섰다고. 금요일에 부임하고 토요일까지 몇몇 신자를 만나 면담을 하고서 딱 한 가지 내린 결론. 첫 번째 일요일 설교에서 일갈했다. 절대 남의 험담하지 말라고. 교회를 분열로 끌고 가는 악마의 유혹을 단호하게 잘라버리라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했다는 X라는 여 신자가 Y라는 여 신자 욕을 엄청나게 해서 그럴 수도 있나 궁금했던 점. 다음 날 부임 목사와 신자가 하례식을 할 때 기절초풍했던 일. X가 Y를 만나자 꼭 껴안고 반가운 척 인사하는 걸 보고, 나중에 목사한테도 저렇게 뒤통수 치겠구나 싶어 섬뜩했다고. 첫날 설교에서 이 사실을 토대로 강한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남의 험담을 하지 맙시다. 뒤통수 치지 맙시다. 내가 당해서 싫은 것, 남에게 하지 맙시다. 뿌리는 대로 거둡니다. 그날 설교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장맛비였다. 

 

남 앞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사람, 나대는 사람, 생색내는 사람,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 남 생각 않고 나뿐인 사람. 남 험담을 즐기는 사람. 교회뿐만이 아니다. 봉사 단체나 교민 모임이나 친목 모임이나 그런 사람은 꼭 있다. E가 바로 그 교회 X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왜 그런 책을 쓰셨을까? “남의 험담만 안 해도 성인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을 짓밟는 험담은 악마의 바이러스다.

 

***

 

B가 A한테 토로했다. 지난번 E한테 당한 일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 모양이었다.

“그 여편네 E는 개념이 딱 제로야. 절대 다시 만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A가 당한 것처럼 나도 똑같이 당했거든. 지난번, 급기야 몸싸움까지 가서 머리끄덩이 잡아 흔든 사건 발단도 없는 험담 만들어 남한테 전해서였어. 언젠가 E를 만나 이야기했는데, E는 그것을 집에 가서 노트에 적어둔 거지. 날짜, 장소, 누구, 이야기 내용, 각색한 것. P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한 것 중 자기가 흉본 것은 쏙 빼고 내가 험담했다 싶은 부분은 침소봉대해서 써 둔 거야. P를 만나서 은근히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들려준 거지. 어느 날짜, 어떤 장소에서 내가 뭐라 씹었다고 흘린 거야. 그렇게 발설하면 좀 친해질까 얕은꾀를 쓴 거지. 다행히 P는 E의 인간성을 미리 알았어. 나중에 그 이야기를 나에게 다 알려주더라고. E는 1분 이야기할 것을 10분은 떠드는 여편네야. 입에 개 거품을 품거든. 함께 식사도 못 해.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도 떠드는 통에 입에 있는 음식이 앞 요리접시에 튀어나와 젓가락을 놓은 적도 있어. 내가 분별을 못 해서 사악한 여편네 만나 오래 속 끓은 것도 죄진 느낌이야. 시간을 낭비한 죄! 하늘 앞에 부끄럽지.”

 

“빠삐용을 연상시키네. 시간을 낭비한 죄? 나도 죄 그만 지어야지. 험담하는 무녀, E는 모르는 사람이야 내게도. 이제부턴 몰라.” *

 

 

 

LYNN: 소설가. 오클랜드 거주


1 Comments
신문 2018.08.29 00:18  
“ ‘그 여편네’가 또 발광했구먼. 성질머리 아직도 그대로야. 인생 참 딱하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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