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8)] 토순이와 토돌이
토끼 두 마리가 우리 집에서 한 달간 하숙을 했다. 가깝게 지내는 토끼 주인 가족이 여행을 떠나면서 맡기고 갔다. 이름을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길고 흔하지 않은 영어 이름이었다. 부르면 쪼르르 달려온다고 했는데 토끼가 그 정도로 영리한지는 모르겠다.
아쉬운 대로 이름을 다시 지었다. 어느 놈이 암컷이고 수컷인지 모르겠다. 행동으로 보아 검은색에 하얀 무늬를 띄고 있는 순한 놈에게 토순이를, 회색과 연갈색 중간색의 씩씩한 녀석에게는 토돌이라 붙였다. 두 녀석 다 귀가 길고 축 처진 모습이다. 랍-이어드 레빗(귀가 처진 유럽 종 토끼, Lob-eared rabbit)이라는 비교적 순한 종자라 한다.
열 살과 여덟 살인 두 손자 조셉과 조슈아가 2주 방학 동안 돌봐주기로 했다. 손자들은 애완동물을 직접 길러보지는 않았다. 갓 도착한 토끼를 쳐다만 보던 조셉이 가까이 가서 조심스레 손을 대본다. 조슈아도 따라 한다. 부드러운 털 감촉이 좋단다. 손가락이 물릴까 봐 겁을 내면서 긴 풀을 먹인다. 조금씩 씹으며 삼키는 토끼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나 보다.
내게는 애완동물에 대한 트라우마(Trauma, 충격적인 경험)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하교 길에 갓 부화한 병아리 두 마리를 샀다. 겨울이라 추웠다. 이불로 싸서 아랫목에 놓았다. 두 살 위인 형이 급히 지나가다 발을 잘 못 디뎠다. 내가 안 보이게 이불을 덮어 놓은 게 실수였다. 이불을 열어 보니 끔찍하다. 동네 뒷동산에 묻어 주었다. 많이 슬펐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전차를 타고 종로 5가 제일은행 옆에 가 금붕어 두 마리를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 왔다. 빨간 금붕어가 아주 예뻤다. 제법 오랫동안 어항 속에 잘 길렀다. 알을 낳지 않았던 걸 보면 두 마리가 다 수컷이었던 같다.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친구한테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받아 오셨다. 이름은 살찐이. 잘 먹고 운동은 싫어하는 놈이었는데 어느 날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신설동에 있는 선배 치과에 이를 치료하러 갔다. 어항 속 금붕어가 알을 배어 배가 터질 듯 불러 있었다. 알 낳을 곳이 없어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서 종로 5가에 있는 열대어 상점에 수초를 사러 갔다. 수초는 보이지 않고 온통 플라스틱 모형밖에 없었다. 주인아저씨에게 수초가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살아 있는 수초를 찾느냐며 북에서 온 사람 보듯 아래위를 훑어본다. 씁쓸한 기분으로 상점을 나왔다.
토순이와 토돌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매일 새로운 느낌이 든다. 첫날은 조용하고 순해서 좋았다. 개처럼 짖지 않고 고양이처럼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사납게 덤벼들지도 않고, 무서워하며 도망가지도 않았다. 서로 싸우지도 않고 사이좋게 잘 논다.
이튿날에는 큼직해 보이던 2층짜리 토끼장이 하루 만에 작아 보였다. 토끼장에서 일어서면 머리가 천정에 닿았다. 넓은 풀밭에 내어 주고 싶다. 순간 주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토끼는 태생이 굴을 잘 파니 잘 못하면 땅을 파서 밖으로 나간다.”
울타리를 쳐주면 실컷 뛰놀며 싱싱한 풀을 뜯어 먹을 수 있을 텐데. 한 달만 있기로 해서 일을 크게 벌이기에는 마땅치 않다. 거실 바로 밖에 두 평 남짓한 데크가 있고, 거실 유리문과 부엌 벽면 그리고 허리 높이의 나지막한 나무 담으로 둘려 있다. 풀밭으로 내려가는 출입구만 막으면 도망가지 않겠다.
놀랍게도 토순이와 토돌이는 정해진 플라스틱 대소변 통에 들어가서 일을 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출구를 플라스틱판으로 막고, 토끼 집기와 먹이를 두 손자와 함께 옮겼다. 옮겨온 토끼는 연신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다.
조셉과 조슈아는 토끼들에게 풀을 먹이고 귀엽다고 쓰다듬는다. 첫날 보다 훨씬 친숙해졌다. 지난해 경찰 행사가 있을 때 경찰 개를 만져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손자 둘 다 무섭다고 가까이 못 갔던 기억이 났다.
한동안 풀을 먹던 토돌이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뛰어간다. 토순이도 뒤따라 뛴다. 두 발로 일어서서 거실 유리문을 기웃거린다. 조셉이 거실에 들어가고 싶어 하나보다며 집안에 들이자고 한다. 나중에 발을 씻긴 다음 하자고 만류했다.
데크를 돌아다니던 토돌이가 앞발 두 개를 기도하듯 모으고 두 발로 일어선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다. 반 시간 정도 지나 갑자기 바람이 불며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비상이다. 재빨리 토끼장으로 옮기고 먹이와 물을 보충해주고는 손자들과 안으로 들어왔다.
조슈아가 토끼가 잘 있나 궁금하단다. 토끼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토순이와 토돌이가 반가워한다. 조슈아가 주는 당근을 정신 없이 갉아먹는다. ‘한 달간 잘 지내고 나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며칠 후 이른 아침 조셉이 날 깨운다. 토끼한테 가 보자고. 토순이가 배를 바닥에 깔고 길게 늘어져 있다가 급하게 일어난다. 토돌이는 앞이 가려진 이 층 침실에서 뛰어나온다. 토끼집 망 사이로 하얀 코를 내밀고 인사하면서 먹이를 달란다. 조셉이 토끼장 바로 옆에 있는 싱싱한 풀을 잘라서 주었다. 풀을 다 먹인 후 다시 토돌이와 토순이를 데크로 옮겼다.
주위를 돌아 본 토끼들은 유리문 앞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는다. 토순이는 토돌이의 배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토돌이는 세수를 시작한다. 열심히 침을 발에 발라서 얼굴에 문지른다. 얼굴 치장을 한참 한 후에는 긴 귀를 앞다리로 붙잡고 다시 침을 묻혀 닦는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에 연신 침을 찍어 바른다. 아무리 잘 치장해도 검은 얼굴은 더 검어진다. 세수를 마치고는 토순이 머리를 씻어 준다. 토순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머리를 감고 나서 토순이도 세수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비디오를 좋아하는 조셉은 스마트폰에 담았다. 5분이 조금 넘는 분량인데 나중에 학교에서 필요로 할 때 쓰겠단다. 토순이가 세수를 마치자 토돌이는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달리기 시작한다. 뛰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뛰는 과정에 40센티가 넘게 점프도 하고 점프 도중에 몸을 뒤틀며 공중 곡예도 선보인다. 갑자기 김연아의 공중회전이 생각난다. 이제 두 토끼가 적응이 많이 되었나 보다.
토순이 토돌이가 온 지 보름이 지났다. 2주만 더 있으면 본래 집으로 돌아갈 거다. 조셉과 조슈아가 많이 아쉬워할 것 같다. 아쉬운 이별이 아픔으로 남는다면 어떻게 해줄까?
글_김인식
‘글 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 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