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명소를 찾아 1-랑기토토 섬(Rangitoto Island)
“최고의 여행은 실종”…그래도 돌아와야만 했다
19세기 말 하루 여행지로 오클랜드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 받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데본포트에서 본 랑기토토 섬.
시집 한 권을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제목은 ‘섬.’(열림원 펴냄) 부제로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이라고 쓰여 있다. 딱 1천 권만 찍은 특별판이다. 내 소장본은 436번째. 정현종은 ‘나는 별아저씨’,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방문객’ 등의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시선집에 나오는 첫 시의 제목은 ‘섬’이다. 이 시는 딱 두 줄로 되어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전문
토요일 아침, 간단하게 배낭을 꾸렸다. 말린 과일(복숭아)과 육포 한 봉지(100 gram), 물과 자외선 차단제 그리고 시집 한 권. 오클랜드 부두(Queens Wharf. 페리 빌딩)에서 배를 탔다. 반 시간도 안 돼 나는 ‘무인도’에 떨어졌다.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섬, 랑기토토. 늘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벌써 네 번째. 새해 초만 되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옮겨진다. 산신령의 기(氣)를 받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약 6천 년 전에 생겨…최고 높이는 260m
랑기토토는 화산섬이다. 지질학자는 약 6천 년 전에 섬이 생겼다고 말한다. 500~600년 전 마지막 화산 활동이 있었을 거로 추정한다. 폭은 5.5km, 최고 높이는 260m. 면적은 2,311헥타르(약 700만 평). ‘성탄절 꽃나무’라고 불리는 포후투카와(pohutukawa)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마오리 말인 ‘랑기토토’(rangitoto)는 ‘피로 물든 하늘’(Bloody Sky)이라는 뜻이다. 마오리 추장이 랑기토토에서 적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어 피에 물든 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 슬픈 역사를 안은 랑기토토는 1854년 영국 왕실에 15파운드에 팔렸다. 아오테아로아(Aotearoa, 하얗고 긴 구름의 나라)를 영국에 넘긴다는 조약(The Treaty of Waitangi, 1840년 체결)을 맺은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19세기 말, 랑기토토는 오클랜드 주민들에게 하루 여행지로 사랑받았다.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와서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오후 늦게 돌아가는 코스였다. 1920년대~1930년대 180채의 배치 하우스(Bach House, 조그마한 휴가용 집)가 지어졌다. 지금은 30여 채만 남아 있고, 사람이 실제로 사는 집은 한 채도 없다.
1925년~1936년 죄수들이 도로를 닦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말에는 미군의 지뢰 매장 시설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상에 서 있는 창고와 관측소가 그 흔적 가운데 하나다.
정상까지 한 시간 걸려…어린이 교육장도 있어
‘여행은 쉼.’ 정상을 15분 정도 눈앞에 두고 있는 쉼터.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초보 등산객도 쉽게 ‘정복’할 수 있다. 산행 중간중간 크고 작은 검은 돌이 보인다. 현무암,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이다. 용암이 빠르게 굳어 만들어진 것이다.
10여 분을 걸었을까. 랑기토토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교육장이 나타났다. 유독 큰 돌이 많이 보이는 곳이었다. 한 엄마가 어린 아들에게 섬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들이 눈여겨 주위를 관찰했다. 어린아이들을 둔 부모라면 꼭 거쳐 가야 할 곳처럼 보였다.
보통 체력을 지닌 남녀라면 한 번도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모바일 폰에 탑재된 만보기 앱(App)이 걸음 수 8천 가까이를 가리킨다. 저 멀리 꼭대기가 보인다. 정상에 서는 순간, 360도 파노라마 전망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오클랜드를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홀로 하는 산행. 다른 등산객에게 ‘인증사진’을 부탁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온 여자였다. 오클랜드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마음이 울적해 혼자 올라왔다고 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의 여주인공 니콜레타 브라시를 닮았다.
등산객들 틈 사이에 끼여 휴식을 취했다. 말린 과일과 육포가 소박한 내 점심. 배만 채우기가 아쉬워 시집을 꺼냈다.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1연과 2연
애초 정상에 오르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섬에 갔다 오고 싶었’다. 랑기토토에서 ‘그 무엇’을 얻었다면 만족이다. 그때가 새해 초면 더 좋을 뿐. 다시 한 시간, 내 발은 따끈따끈한 바닷물과 함께 있었다.
박물관, 초기 정착민 살림 도구 그대로 전시
초창기 사람들이 살던 집, 방에는 자그마한 침대와 서랍장이 전부다.
랑기토토를 산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도 세 가지다. 내가 고른 길은 가장 많은 사람이 따라 하는 코스다. 동굴이 나오는 길도 있고, 옛날 채석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길도 있다. 편도로 한 시간에서 세 시간짜리다. 그 어떤 쪽을 고르든 랑기토토의 기운을 받을 수 있다.
색다른 방법은 화산 탐험(Volcanic Explorer) 기차(?)를 타고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내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딱히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느낌상 나이 든 사람이나 장애인 혹은 어린아이에게 맞을 듯싶다.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다 시간이 좀 남아 안내소라고 할 수 있는 배치 하우스(Museum Bach)를 둘러 보았다. 1927년에 지어진, 아주 소박한 집이다. 그 당시 사용했음 직한 살림 도구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유독 눈에 띈 것은 두 평도 안 되어 보이는 방이었다. 침대 하나, 서랍장 하나, 그리고 추억의 먼지들.
박물관은 토요일에만 운영된다고 한다. 자원봉사자가 나서 번갈아 가며 지키고 있다. 전시실 한쪽에 방명록이 보였다.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썼다. 그 옆에는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
멀리서 경적이 울렸다. 배가 곧 떠난다는 뜻이었다. 나는 시간 여행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귀향 배를 타려는 데 오래전 책에서 읽은 멋진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최고의 여행은 실종이다.”
랑기토토는 무인도다. 한 가족(마오리)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무인도로 여겨지는 섬이다. 배를 놓치면 돌아갈 방법이 없다. 하룻밤 별님이나 달님을 벗 삼아 새거나, 큰돈($200~$300)을 내고 배를 빌려 가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그걸 핑계 삼아 자발적 실종을 자행하거나.
“뿌웅~뿌웅!’
다시 경적. 나는 배에 올랐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소금 기둥이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어떡하든 올 한해, 잘 버텨 내야지.’ 랑기토토는 점점 멀어지고, 오클랜드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나는 한 해 첫 ‘과제’를 치렀다.
글과 사진_프리랜서 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