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하는 한인들의 쉼터, <화요음악회> 200회 맞아
“사람 마음을 위로해 주는 데 음악이 최고지요”
LP판과 CD 합쳐 1만 여장 보유…음악 영화 보고, 작은 음악회도 펼쳐
지난 8월 22일(화) 오후 6시 해거름이 서서히 질 무렵, 나이가 지긋한 선남선녀들이 하나둘 차에서 내렸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거리를 자랑하는 스탠리 포인트(Stanley Point, 데본포트 바로 옆 동네)의 한 가정집을 찾아온 것이다. 화요음악회 200회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첫 모임에 여덟 명 참석…대학생 때부터 음악에 취해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펼쳐온 화요음악회(대표: 김동찬, 호: 석운)가 어느덧 200회를 맞았다. 2012년 3월 6일 처음 시작한 음악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오클랜드의 문화 활동을 대표하는 모임으로 자리매김했다.
“첫 음악회에는 저희 부부를 포함해 여덟 명이 참석했어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모여 편하게 클래식을 들어보자는 뜻이었어요. 그날 함께 들은 첫 곡은 베토벤의 작품이에요. 연주 시간이 15분이 넘지 않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을 골랐지요. 그런 식으로 서너 곡을 들었어요. 소박하게 시작했는데 저도 이렇게 200회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석운(夕雲)은 1960년대 말 대학생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다. 시간만 나면 학교 앞에 있던 학림다방에 들러 두 눈을 감고 황홀한 음(音)의 세계에 빠졌다. 학림다방은 클래식 음악을 주로 틀어주던, 그 당시 젊은 지성인의 음악 쉼터였다.
1994년 석운이 뉴질랜드에 이민 올 당시 그의 이민 짐에는 4~5천 장의 엘피판(LP)이 들어 있었다. 그가 애지중지 모은 ‘명판’들이었다. 이민을 와서도 한동안 음악전문점이나 벼룩시장(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간이로 열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판을 모았다. 엘피판이 시디(CD)로 바뀌는 시기라 뜻하지 않은 판을 헐값에 얻는 기쁨을 누렸다. 그렇게 해서 모은 게 또 3~4천 장이다.
석운은 늘 음악 듣고 책 읽는 삶을 살아왔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거나,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 둘의 완벽한 조화를 누구보다 더 뜻깊게 여기는 르네상스인이다.
제17회 모임 때. 숫자가 조금 더 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위주로 들으면 돼”
음악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석운이 주는 도움말.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위주로 들으면 돼요.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꼭 엘피판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요즘은 음원이 뛰어나 음의 큰 차이가 없어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다 보면 언젠가 귀가 뚫릴 거예요.”
화요음악회가 열리는 장소는 석운의 집 1층 창고를 개조한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술의 기운이 몸을 감싼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누구나 다 아는 몇 개의 유명 오디오와 수천 장의 엘피판과 시디 그리고 공간 곳곳을 빛나게 하는 옛 축음기와 소품이 눈에 띈다. 방문객들은 자연스럽게 ‘뮤즈(Muse, 학문과 예술을 맡은 신)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화요음악회에는 ‘음악’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영화 상영이, 때로는 작은 공연이, 또 때로는 흥겨운 축제가 펼쳐진다. 설날이나 한가위 혹은 성탄절 같은 절기는 물론 50회, 100회 같은 특별히 기억하고 싶을 때 ‘색다른’ 잔치 마당으로 이어진다. 그때 참석자들이 손수 준비해 온 음식이 사람 사는 정을 더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200회를 해 오는 동안 더러는 쉬고 싶을 때도 있었죠. 그런데 그때마다 비가 오더라도 날씨가 춥더라도 늘 음악회를 찾아오는 분들을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었어요. 제가 뉴질랜드에 사는 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어요.”
화요음악회를 통해 지금까지 들은 곡은 대략 1천 곡이 넘는다. 그 세세한 기록은 석운의 카페(다음: 초대받은 사람들의 삶)에 잘 나와 있다. 석운의 클래식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화요음악회 초창기 때 석운의 모습.
최고의 음악은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연주곡
석운이 꼽은 최고의 음악은 무엇일까?
“20세기 바이올린의 황제라고 불린 하이페츠(1901~1987)가 연주한 곡을 자주 들어요. 아마 40~50번은 들었을 거예요. ‘클래식 음악의 백미’라고 생각해요.”
석운이 귀띔한 클래식 음악 듣는 법.
“오디오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듣는 사람의 귀와 가슴이 중요하다고 믿어요. 아무리 좋은 기기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소리의 경계선을 넘으면 결국 좋은 게 아니라 ‘다른 거’거든요. 기기의 중요성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죠.”
반세기 동안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사는 석운이 생각하는 음악의 효용성은 무엇일까?
“사람 마음을 위로해 주는 데 최고예요.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으면 나중에는 치유가 되기도 하고요.”
화요음악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시작한다. 그 전에 20~30분 동안 간단하게 차를 나눈 뒤 음반과 시디와 책으로 둘러싸인 멋진 감상실에서 세계의 음악가들과 연주자들을 만난다. 소리를 글로 담을 수 없어 그 황홀한 느낌을 표현할 수 없지만, 사람 사는 곳 가운데 가장 멋진 공간임은 분명하다.
“화요음악회를 하기 전에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곡을 들었어요. 요즘은 보통 사람도 듣기 쉬운 곡을 고르려고 해요. 혹시 특별히 듣기를 원하는 곡이 있으면 함께 들을 수도 있어요. 저만의 공간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공간이니까요.”
타노이 스피커, 담백하면서도 소리가 깊다.
화요음악회, ‘정이정’(淨耳亭)이라고도 불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저 높은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사람만큼 무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사람이 많지 않다. 화요음악회를 200회, 햇수로 5년 넘게 꾸준히 해온 석운이 그런 예다.
“우스갯소리로 화요음악회가 2천 회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하는 분이 계셔요. 시간으로 따져보니까 50년을 더 해야 하더라고요. 저를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교민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쭉 펼쳐졌으면 좋겠어요.”
지난 200회 특별 모임은 참석자들의 노래자랑, 어린 남자아이의 국악 발표, 한일수 박사의 피아노 연주, 몇몇 참석자의 시 낭송 등으로 진행됐다. 맛난 음식에다 소리와 흥이 버무려진 이 날 잔치는 이민 생활에 큰 활력소를 불어 넣어 주었다.
화요음악회가 열리는 공간은 정이정(淨耳亭, 귀를 깨끗하게 하는 정자)이라고도 한다. 한인 사회를 예술적으로 더 풍요롭게 한 석운의 따듯한 마음과 그의 아내의 꾸준한 돌봄이 오클랜드를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부디 화요음악회가 500회, 1천 회를 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문화 공간으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_프리랜서 박성기
1회 때 들은 음반 가운데 한 장.
화요음악회 모임 안내
장소: 150 Calliope Road, Stanley Point
시간: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전화: 021 717 028
카페: http://cafe.daum.net/invitedlife
◈ 해외 여행 등 특별한 기간에는 쉼.
연주 전 정경
연주가 없을 땐
그냥 정물(靜物)이었던
피아노
오늘 연주를 기다리듯
스스로 몸단장을 마쳤다
보통 땐 기껏
한 덩어리의 청동이었던
피리 부는 여인
오늘은 숨결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날을 위해 멀리서 온
화분마저
자못 기대에 찬 듯 가끔
리본 자락을 흔들거렸고
바닥에 앉아있는
풍선 광대는
기다리세요 곧 시작할 거에요
느긋하게 팔짱 끼고
함뿍 미소 짓고 있었다
(석운이 100회를 맞아 쓴 자작시)
공간을 더 빛내 주는 옛 축음기.
석운이 추천하는 음악 영화 열두 편
1. 호로비츠를 위하여
2. 샤인(Shine)
3. 어거크트 러쉬(August Rush)
4. 홀랜드 오퍼스(A symphony of Life)
5.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6. 파리넬리(Farinelli)
7.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
8. 피아니스트(The Pianist)
9.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10. '앙드레 마티유, 리틀 모짜르트(The Child Prodigy)
11. 더 콘서트(The Concert)
12.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
석운이 추천하는 음반 다섯 장
1.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2.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모음집
3. 토벤 첼로 소나타 전집
4.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과 베토벤 운명 교향곡
5. 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우선 생각한 것이 음악이었다. 내가 음악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그런대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소스(L/P판과 CD)를 꽤 소유하고 있고 오디오도 나름대로 갖추고 있으니까 이를 열어놓아 사람들이 마음 편히 와서 듣고 대화를 나누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집사람과 같이 의논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또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는 집사람이 쾌히 동의하기에 우선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 저녁에 모임을 가지려고 이런 모임을 가장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몇 분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3월 6일 저녁에 첫 모임을 가졌다.”<1회 음악회를 마치고>
“오늘 초대 손님으로 오신 어느 여자분께서는 마치 고향의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감하였습니다. 아무리 지상의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는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지만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교민들의 가슴은 한구석이 허전하기 마련인데 이런 자리에서는 그 허전함이 잠시라도 채워질 수 있기에 하시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화요음악회는 음악을 듣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자칫 허허롭기 쉬운 교민 사회에서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서로 만나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도 계속되어야 하고 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200회 화요음악회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