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 빛과 어둠의 간이역
일요시사
0
646
0
0
2017.03.09 12:23
백동흠: 수필가. <에세이문학> 등단 <한국수필>. <에세이포레> 수필 상 수상
매미 소리에 잠이 깬 주말 아침이다. 샤워하고 나니 한층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 창가에 앉아 가벼운 아침을 든다. 한가로운 바깥 풍경이 고즈넉하다. 새들이 팜 트리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비숑 강아지를 데리고 이웃집 주인이 산책을 나서고 있다. 멀리, 리저브 잔디 구장에는 조기축구를 하는 이들이 활발하게 뛰어다닌다. 선선한 날이다.
지남밤, 늦게까지 택시 운전을 했다. 오랫동안 낮에만 운전해 왔는데, 어제는 낮에 다른 일을 보느라 오후 늦게 시작해 자정까지 밤거리를 누볐다. 생소한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세상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바라보는 내 시각이 바뀐 것인지… .
금요일 오후답게 택시 일도 많고 거리가 차들로 밀렸다. 택시를 불러도 픽업 지점에 도착하면 늦기가 예사였다. 부른 시간에서 조금만 늦게 가도 손님 표정이 어두웠다. 미안한 마음에 지름길을 더 터서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내려주는 일에 집중했다.
#1. 폰슨비 카운트 다운에서 부른 아가씨 손님이었다. 목적지는 킹슬랜드 기차역. 늦어서 기차 놓치겠다고 서둘러 달랬다. 요리조리 지름길을 골라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13.40 요금이 나왔다. 크레딧 카드로 긁으니 $2.50 카드기 사용 추가 요금이 더해졌다. 토탈 $15.90. 미터기를 누르고(꺼진 뒤) 카드결제가 이루어졌다. 순간, 아가씨가 버럭 화를 냈다. 왜 미터기를 껐냔 다. $13 정도로 아는데 왜 이리 높냐고? 택시 타며 카드 결제 처음 하는 아가씨 같아 자초지종을 알려주는데도 화가 안 풀린 모양이었다. 기차 늦겠다고 내리며 차문을 탁 닫았다. 휑하니 기차역으로 사라져갔다. 순진한 아가씨 얼굴이 몇분만에 그리 바뀌다니. 때론 모름이 화를 불러일으킨다. 어둠의 간이역이 다른데 있는 게 아니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가는 아가씨의 매서운 걸음걸이… . 한참을 멀찍이 바라보다 핸들을 돌렸다.
#2. 1번과 같은 폰슨비 카운트 다운에서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밀려 역시 늦게 태웠다. 목적지는 포인트 쉬발리에. 서둘러 아는 길로 가려니 청년이 지름길을 안내해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카운트다운에서 일한다고 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터 요금이 $16.00로 나왔다. 카드를 받아 결재하려니 $25.00 로 하란다. 토탈 $27.50이 될 거라고 설명까지 덧붙여줬다. $9.00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일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준 것일까. 빈 도시락통을 담은 비닐 주머니를 들고서 청년이 택시에서 내렸다. 집으로 향하며 내게 손을 가볍게 흔들어줬다. 저녁 햇살이 그의 어깨 위를 감싸주었다. 빛의 간이역이란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어둠과 빛의 간이역을 지나며 스쳐 가는 풍경들… . 세상 처음에 빛이 있었다. 성경 말씀이다.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 천지창조 속에 어둠과 빛이 비롯되었다. 그다음에 다른 것들이 하나씩 채워졌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도 추리고 추리면 결국은 어둠과 빛의 현상으로 귀결된다. 어둠인가. 빛인가. 결론은 단순하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이론을 말하지 않아도 양심에 비춰보면 명쾌하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남에게 불편을 주는 일은 찜찜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면 거칠 게 없다. 자명하다. 최근 들어 ‘양심 성찰’에 대한 강연이 유튜브 동영상에 많이 떠서 여러 번 보고 들었다. 양심 성찰 답은 둘 중 하나다. 자명한가. 찜찜한가.
최근, 고국의 촛불집회를 TV로 자주 보곤 한다. 촛불은 어두운 세상과 현상을 비추려는 상징물이다. 극한 어둠으로 온통 뒤덮인 정치와 사회를 빛으로 비춰보려는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서구사회의 중산층 개념에는 ‘공분’이라는 것이 필수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세상을 어둠으로 덮는 사회적 문제나 정치 부패 현상이 있으면 ‘공적인 분노’가 정화 작업에 불을 붙이곤 한다. 그런 것에 무관심하면 어둠 세력이 무섭게 번지게 마련이다. 수수방관은 부정부패를 용인하는 격이 된다. 급기야 세상은 어둠으로 뒤덮이고 만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자리에 간이역 같은 게 있는 걸까. 만나고 헤어지며 멀어져 가는 사람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어느 순간, 생각이 허방에 빠지는 듯한 착각이 일곤 한다. 빛의 경계를 벗어나서 다른 어둠에 들어선 느낌이 들 때다. 그때는 선뜻 차에서 내려 차 주위를 두어 바퀴 돌며 내려앉은 마음을 추스른다. 잠깐의 휴식이라도 갖고서 차에 오르면 운전대 잡는 감각이 가볍다.
하루에도 수없이 빛과 어둠의 경계를 지난다. 인생에서 빛을 경험하는 순간은 아주 짧다. 우리의 생은 그 찰나 빛의 간이역에 머물렀다가 가는 것…
빛의 간이역은 우리더러 머물다 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좀 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는 작은 일들에 여운을 남겨 그 속에서 자각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빛의 간이역에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것을 넌지시 깨우쳐 주곤 한다.
빛과 어둠의 모호한 경계에 설 때, 묻곤 한다. 자명한가. 찜찜한가. 양심이 바로 답이다. 양심은 빛이다. 자명함이면 충분하다. 찜찜하면 한 가지를 덜어내라는 신호다. 그한가지가 욕심 괴롭힘 두려움 내세움 등이 아닐까. 고대 이집트에서는 저 세상 문턱에 오시리스의 저울이 있다고 여겼다.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다는 의식이다. 영혼의 자명함과 찜찜함을 그대로 판가름하는 것이다.
빛의 간이역에 머무는 순간은 아스라한 여운을 남긴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순해지는 가을 햇살로 내리비추고 있다. 선선한 바람기를 느끼며 계절의 환승역을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