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41) 믿는 자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8:5~1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주신 이후에 벌어진 기적의 역사 중에 하나입니다.그 중에서 본문은 두 번째 기적으로, 중풍병에 걸린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치유기사는 연속되는 다른 아홉가지 기적과는 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백부장의 종을 직접 만나보지도 않으시고 고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십사하는 요청에,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하셨음에도, 백부장은 8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놀랍게 여기시고, 칭찬하십니다.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처럼 믿음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 병고침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를 향한 믿음을 가진 자인 줄 믿습니다.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신앙이라는 말 자체도, “믿을 신에 우러를 앙” 즉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백성으로, 신앙인으로서, 과연 그에 합당한 생각과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가 정말 믿는 자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나요? 내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고, 어떻게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을 놀라게 하는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때로는 우리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신앙의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기 전의 모습들이 이와 유사합니다.당시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일반 백성들이 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선민사상을 붙잡고 살아갑니다.겉으로는 신앙인인데, 속은 비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망하는 길로 가고 마는 거죠.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실속은 없고 말만 하는 거예요.이런 말씀드리면 머릿 속에 누구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 사람 떠올리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나는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나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람들과 무언가를 하는 중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가?
오늘 예수님과 백부장의 대화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래?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부하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그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냥 명령만 하시면 될줄로 믿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도, 믿는 자라고 자부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믿음은 내가 본적이 없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러한 믿음, 예수님을 놀라게 할 만한 믿음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대단한 믿음은 어떤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간증거리여야만 할까요? 너무 대단한 것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보면 매일 새벽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헌금을 드리면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는 예상치 못했던 분들도 계십니다. 예측되는 삶만 살지 마시고, 놀라게 할 만한 그런 믿음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신앙은 실제입니다. 믿음의 삶은 실제입니다. 내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뭔가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백부장처럼 주님을 놀라게할만한 칭찬받는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죠.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동 서로부터 온 많은 사람은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습니다. 저들은 마태복음 11장 12절의 “침노하는 자”와 같습니다. 저들은 본래 구원의 자리 밖에 거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반대로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에 쫓겨나 이를 갈게 됩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을 뜻합니다.왜 이런 역전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나요? 한 마디로 “신앙의 무사안일주의-지금 아무 일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때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의 복지부동-땅에 엎드려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막연한 신앙의 낙관주의”입니다.
이 삼종셋트 “신앙에 있어서의 무사안일주의, 복지부동, 막연한 낙관주의”가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고, 내 바른 믿음의 정체성을 무너뜨려갑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얼마나 팽배해있는지요.1921년, 약 100년 전에 인구조사 때 뉴질랜드의 기독교 인구가 90프로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8년 인구조사 때에 뉴질랜드의 기독교 인구가 37프로입니다. 물론 실제 교회 출석율로 보면, 37프로도 안될 가능성이 큽니다.그럼에도 성금요일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연휴가 제일 긴 연휴이고, 성탄절이 큰 축제입니다. 사회-문화적인 기독교의 모습입니다.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비슷합니다. 하루 세 번씩 성전에 올라 기도합니다. 철저하게 금식하고 구제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그런데 그 안에 정말 중요한 것,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 믿음의 흔적이 식어버린 거예요. 사회-문화적인 신앙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중간에 나사를 한번씩 조이지 않으면, 마치 자동화기계처럼 신앙생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때로 한번씩 자극이 필요합니다.믿는 자라고 한다면,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침노하는 자, 싸우라는 게 아니죠. 사모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을 가지라는 거예요. 그런 자에게 천국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모든 것은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만한 신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13절에 치유의 선언을 하십니다.그런데 잘 보십시오. 치유의 완성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믿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치유의 기사는 누가복음 7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말씀으로만 하시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께 요청합니다.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백부장에게 정말 큰 믿음이 있었는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혹 부담되어서, 또는 싫어서 그럴싸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하지만 그 의심이 한번에 해소가 되는 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안 믿었으면? 안 낫는 거죠. 믿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오늘 백부장은 믿음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사람입니다.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향해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누가복음에 보면 백부장의 말을 듣고, 유대인 장로, 한 사람도 아니고 몇 사람이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는 말합니다.유대인 장로들이 평소에 싫어하던 예수님 앞에 가서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을 위해서 간절히 구합니다.누가복음 7장 5절에 그 이유를 밝힙니다. “이 로마 백부장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였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충분히 이런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우리가 믿는 자라고 한다면, 성품도 좋아야 합니다. 인격도 좋아야 합니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오늘 백부장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마지막 예수님의 선포도 있지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통해서 증거됩니다. 이방인을 극히 꺼리는 유대 장로들까지 나서서 백부장을 위해 도와주려고 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그의 인격과 성품과 삶이 어떠했는지가 증거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구원의 은혜, 천국의 기쁨, 하나님을 향한 헌신, 더불어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과 맺어가는 모든 삶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 예배와 기도와 찬송, 거기에만 믿는 자의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살아가는 삶 속에서, 그곳이 교회든, 세상이든, 가정이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에 있던지 믿음의 증거가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주신 바 말씀을 붙잡고, 내가 정말 믿는 자라고 한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