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들(36)농구공을 달고 다니는 남자
글_정인화
<사진: 김인식>
“오늘은 농구공에 바람이 빠진 것 같네요.”
모임이 끝나고 P 선생이 던진 말이다. 짧은 순간에 두세 명의 눈길이 내 배 쪽으로 모였다. 유머러스하게 대처하고 싶은데 멋있는 말이 안 떠오른다. 당황스럽지만, 지난 몇 년간 허리둘레가 늘어난 건 사실이니까 별로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농구공은 너무 심한데’라는 생각이 든다. 임신 육 개월에서 바람 빠진 농구공으로 바꾸는 데 이 년이나 걸렸는데, 또 몇 년 뒤에는 무슨 말을 들을지 궁금해진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람 빠진 농구공을 채우려고 칼국수 집에 갔다.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좋다고 했다. 먹을 때마다 감탄했던 칼국수 국물이 무언가 빠진 듯하다. “오늘 칼국수 국물은 맛이 없네요.”라고 말해도 반응이 없다.
오래전에 후각을 잃어버렸는데 이제는 미각도 없어지나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P 선생한테 하지 못했던 말을 칼국수 국물에 화풀이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버렸다. 농구공에 바람이 차듯이 배가 불러온다.
며칠이 지나도 P 선생의 말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럭비공이라면 몰라도, 농구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이 쓰일 때는 불쑥 나온 배를 쳐다보고 만져본다. 오십 대 중반을 훨씬 넘긴 배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는다. 왕(王)자가 그려진 시절은 제쳐 두더라도, 사십 대 말까지는 아무도 내 배에 대해 말한 사람이 없었다.
최근 삼사 년 라면이나 국수로 된 음식을 사 먹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밤에는 배가 출출해서 열 시 넘어 라면을 끓였다. 낮에는 회사에서 가깝고 싸다는 이유로 중국 식당에서 밀가루로 만든 면 종류의 음식을 찾았다.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번 넘게 누들(noodle)로 된 음식을 먹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정보를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래서 살이 부쩍 쪘는지는 몰라도 지난 삼사 년 사이에 엄청난 체형의 변화는 있었다.
한 달 동안 라면 같은 누들로 된 음식을 안 먹겠다고 공표한 날, 회사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위 축소 수술을 한 동료는 성공하면 기념으로 조그마한 선물도 주겠다고 한다. 물론 선물의 내용은 비밀이란다. ‘한 달 동안 누들 안 먹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지. 실패에 대한 걱정보다는 자신감이 부풀어 오른다.
처음 며칠은 쉽게 지나갔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장소에 대한 선택의 폭이 좁아 불편하다. 몇 년 동안 도미니온 로드(Dominion Road)에 있는 차이니스 누들 레스토랑(Chinese Noodle Restaurant)만 다니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날마다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먹을 수도 없고 도시락을 싸자니 귀찮고 점심시간이 짜증스럽다.
밤에는 여러 가지 마른 음식을 저장해놓은 팬트리(pantry)를 자주 열어본다. 라면에 손이 자주 가지만 ‘한 달만’이라는 내면의 소리에 깜짝 놀라 땅콩이나 아몬드 같은 견과류가 담긴 봉지를 들고 문을 닫는다. 짜장면, 라면, 우동 등 밀가루로 만든 면제품을 먹지 않는 게 힘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너무나 많이 내 생활을 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들을 먹지 않기로 한 지 열흘이 지나 카운트다운을 들렸다. 동양식품(Oriental food)이 진열된 곳을 지나면서 신라면을 보았다. 갑자기 몸 전체에서 ‘누들 누들’이란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누들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땅긴다’는 말의 뜻을 처절히 느꼈다. 하지만 ‘이십 일 남았어’를 외치면서 눈을 감고 앞으로 나갔다.
알코올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슈퍼마켓에 가기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슈퍼마켓에 들어가자마자 봐야 하는 포도주는 아마도 그들의 방어벽을 쉽게 무너뜨리는 고문이겠다.
이십일 정도 지나니까 누들 없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종류의 과일과 견과류를 가끔가다 먹고 있는 나를 보면서 동료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잘한다’에서 시작해 ‘아직도’라는 말로 끝나지만 말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를 응원하는 것인지 믿지 못해 비꼬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럴 때는 내가 왜 이들에게 알리면서 시작했는지 후회도 한다. 하지만 이십 일이나 버틴 내가 자랑스러워 실패 없이 한 달 다 채우자고 다짐한다.
목표한 기간의 삼 분의 이가 지났다. 체형의 변화는 별로 없고 농구공의 크기는 줄지 않았다. 그래도 한 달 동안 누들 금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들을 안 먹으면서 처음에는 무엇을 먹을지 몰라 고민을 했는데 이제는 내가 먹는 음식이 더 다양해졌다. 종류뿐만 아니라 재료에도 신경을 쓴다. 이 과정에서 음식에 관한 나의 호기심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건강해지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즐겁다.
그러면서도 음식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바라봐야 할 나이가 아니냐는 생각이 스친다.
‘글쓰는 사람들’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두 번 모여 좋은 글을 나누며 글쓰기도 하고 있습니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