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 차세대 지도자를 찾아 1-멜리사 리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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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 차세대 지도자를 찾아 1-멜리사 리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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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한인 이민사가 30년이 다 되어 간다이민 일 세대는 척박한 땅에 거름을 주는 귀중한 사명을 감당했다몇 년 전부터 일 세대가 흘린 땀과 눈물이 하나둘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바로 뉴질랜드 사회 곳곳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1.5, 2세로 불리는 차세대들이다키위 사회 주류에 편입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그들을 만났다. <편집자>

 


외교부 장관 한 뒤 총독 자리까지 꿰차고 싶어요

언론인 생활 접고 정치인으로 도약훗날 종군 위안부 다룬 다큐 드라마 제작 꿈꿔

 

현실 정치를 해오면서 느낀 점은 한국 교민이 모든 일에 참여율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비단 투표율뿐만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다른 민족과도 유대를 맺어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정보도 다양하게 얻으려고 노력하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뉴질랜드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제발 섬 속의 섬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2008 11 8일 토요일 밤 열 한시. 이날 뉴질랜드 정치계에는 별이 하나 지고, 새 별이 하나 떴다. 진 별은 수십 년 의정활동을 해오면서 세 차례나 노동당(Labour Party) 총리로 일해온 헬렌 클락이었고, 뜬 별은 국민당(National Party)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한국계 뉴질랜더(Korean New Zealander)인 멜리사 리(한국 이름 이지연)였다.

 그날 예순이 가까운 헬렌 클락은 방송을 통해 담담한 어조로 패배를 인정한다고 말한 뒤 국민당의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다. 같은 시각, 마흔이 갓 넘은 멜리사 리는 지지자들과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밖에서 최초로 한국계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멜리사 리. 그의 사무실은 마운트 알버트(779 New North Road, Mt. Albert. 전화 815 0278)에 자리를 잡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은 아니지만, 오래된 건물 벽에는 멜리사 리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해맑게 웃는 모습에서 뉴질랜드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자 꿈 키워와

 멜리사 리는 1966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와 함께 고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꿈많던 십 대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호주로 다시 이주했고 대학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대한민국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1988, 그의 가족은 더 멋진 삶을 꿈꾸며 오클랜드로 왔다. 교민은 몇십 가족에 불과했던, 이민 역사 초창기였다. 교민사회 인프라라곤 하나도 갖추지 못한 황야였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초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임원(Prefect), 대학 때는 학생회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늘 지도자 그룹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작은 힘이 제가 속한 사회를 조금이라도 낫게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뉴질랜드에 온 뒤 그는 곧 사회활동에 끼어들었다.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답게 언론세계에 들어섰다. 방송으로, 글로 그는 아시안 목소리를 대변했다. 스무 해 가깝게 그 일을 해오면서 뉴질랜드 사회 내에서 아시아인의 존재 의미를 부각했다.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러브콜이 들어왔다. 국민당은 49대 총선에서 그에게 비례대표 37번을 주었다. 국민당의 선전에 힘입어 멜리사 리는 국회의원이 됐다.


 

대한민국의 딸이라는 것 잊지 않겠다다짐

 당선 3주 뒤, 멜리사 리는 교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애정어린 지지와 성원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선의 기쁨에 앞서 막중한 책임감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언제든지 대한민국의 딸이라는 것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딸을 강조했다. 어렸을 때 고국을 떠나 한국문화가 익숙하지 않고, 또 한국말도 조금은 어눌하지만 대한민국의 딸로 의정활동을 해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뉴질랜드 한인사회는 그 어느 인재보다 영향력 있는 인재 한 명을 확보한 셈이었다.

 49, 50대에 이어 지난 2014년 치러진 51대 총선에서도 국회의원에 당선돼 3선 의원이 된 멜리사 리는 이제 아시아계를 넘어 뉴질랜드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한국계 뉴질랜드인으로 정치하면서 그가 교민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 정치를 해오면서 느낀 점은 한국 교민이 모든 일에 참여율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비단 투표율뿐만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다른 민족과도 유대를 맺어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정보도 다양하게 얻으려고 노력하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뉴질랜드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제발 섬 속의 섬을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그러면서 동성 결혼법 얘기를 꺼냈다.

동성 결혼법이 의회에 상정됐을 때 여론을 듣기 위해 많은 교민을 만났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요. 대부분이 반대했습니다. 저는 그게 한인사회의 뜻이라고 판단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결국, 77 44(전체 국회의원 121)로 통과는 됐지만, 제 한 표가 교민들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멜리사 리는 자신은 일꾼이니까 맘대로 써먹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언제든 문이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들러 달라는 말이었다. 불법체류 같은 신상 문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문제까지 어떤 분야든 도움이 필요하면 최선을 다해 기꺼이 돕겠다고 밝혔다.


 

김치클럽 결성, 차세대 지도자 측면 지원

 국회의원이 된 다음 해(2009) 그는 김치클럽을 만들었다. 한인사회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다. 현재 오클랜드와 웰링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 모임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한인 1.5세 및 2세들이 각종 세미나, 멘토, 봉사 등을 통해 교민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앞서 걸어간 선배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도움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국적 사고에서 과감히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아직은 양쪽 나라에 걸쳐 있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지만, 뉴질랜드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그 정체성이 빛을 발할 거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은 1.5세나 2세뿐만 아니라 모든 교민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짐작하다시피 멜리사 리의 시간표는 살인적이다. 일주일 내내 마음 편히 쉴 시간이 없다. 회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하루 다섯 시간도 채 잠을 자지 못한다. 산더미 같은 서류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인사회를 포함해 다민족 사회의 일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들이어서 그렇다.

 “얼마 전 노동당 출신 한 의원이 이런 말을 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집값 상승의 주범이 중국 사람이라는 식의 발언이었지요. 그 말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중국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동당을 지지했겠습니까? 아울러 비슷하게 생긴 한국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식한 말을,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반론도 제기했습니다. 제 역할이기도 하니까요.”

 

현재 다민족부 정무차관으로 활동

멜리사 리는 현재 다민족부 정무차관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국민당 상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꿈이 여기서 그칠리 없다.

당연히 장관도 하고 싶지요. 전에는 소수민족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경력을 좀 더 쌓아 외교부 장관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존 키 총리, 외교부 장관과 함께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 직책이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조금 더 선수(국회의원 횟수)가 늘면 가능하겠지요?

제 정치 지향점의 마지막은 뉴질랜드 총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지요. 뉴질랜드 최초 한국계 여성 총독, 그럴듯하지 않을까요?”

멜리사 리는 인터뷰 내내 여유가 있었다. 언론계 출신이라 이쪽 분야에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경험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기분 전환을 위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내심 존 키 총리나 유명한 정치인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뜻밖의 사람을 꼽았다.

엄마요. 무척 강하시고 모든 일에 바르십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요. 지금도 집에 들어가면 엄마에게 혼나는 게 일입니다. 제 정치적 멘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그는 정치인의 삶이 끝난 뒤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영화 한 편을 올리고 싶다고 밝혔다. 현실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 일종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쓰고 있다는 영화 소재가 놀라웠다.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내용이라고 귀띔했다. 고국을 떠난 지 마흔 해가 다 되어가지만, 멜리사 리(이지연)에게도 역시 피할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꼭 투표해 참여해야 합니다간곡히 당부

 마지막으로 교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투표를 꼭 해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를 더 멋지게 만드는 방법은 투표가 최선입니다. 그래야 정치인이 국민(한인)을 무서워하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한국 속담처럼, 정치에 관심을 두고 선거 때마다 꼭 투표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국민당, 그리고 저한테 표를 주시면 더 좋고요. 하하.”

 멜리사 리는 현재 국회 내에서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서 한인사회도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시간 내내 정성껏 질문에 답해준 그는 한국 출신 뉴질랜드 국회의원으로 최선을 다해 의정활동을 해 나가겠다교민사회가 큰 힘을 실어줘 감사드린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국회의원 사무실치고는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그곳을 나서려는데 대기실 한쪽에 동양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멜리사 리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재 뉴질랜드일본회 회장이라고 했다. 멜리사 리의 당찬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_프리랜서 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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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멜리사 리는 자신은 한인들의 일꾼이니까 맘대로 써먹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언제든 문이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들러 달라는 뜻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아래로 접촉하면 된다.


주소: 779 New North Road, Mt. Albert, Auckland

전화 09) 815 0278(이송민 보좌관)

홈페이지: www.melissalee.co.nz

이메일: sarah.lee@parliament.govt.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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