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6)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76)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9:1~8>

우리가 성경을 보다보면, 아주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장엄하거나, 기적적이거나, 엄청난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거나, 또는 평안함으로 인해 기억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장면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열왕기상 18장입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웁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엘리야는 불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당시 이스라엘을 타락의 길로 이끌어가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 선지자 850명을 다 진멸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엘리야는 앞선 18장과는 딴판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죽기를 구하는 나약한 모습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당당했던 엘리야가 한 여인의 말에 두려워 도망치고, “하나님! 차라리 저 좀 데려가주세요.” 그러고 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와 똑같은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장에서도 승승장구하다가,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도 어느 순간 우울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자녀가 그렇게 나의 자랑거리였는데, 갑자기 감추고 싶은 존재로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게 다 평안하고 형통하고 잘 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복을 이룰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혹 지금 침체의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혹 앞으로 침체를 겪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 회복을 이룰 힘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도록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엄청난 승리의 역사를 이룬 엘리야, 그 엄청난 역사 뒤에 들려온 소식이 무엇인가요? “내가 너를 절대로 그냥 살려두지 않겠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 인간의 능력안에 해당되지 않는 말이 이겁니다. “절대로”. 인간의 영역에 있어서 “절대로”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절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그런 거예요. “내가 절대로 너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내일이면 너도 죽을거다.” 

  

이 말에 엘리야는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엘리야가 지금 광야로 도망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광야까지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합니다. 지금 엘리야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이세벨에게 잡혀 죽으면 곱게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 너무 무서우니까 얼른 데려가주세요.” 이런 기도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기도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오늘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쨌거나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몸종 하나 데리고 저기 유다지파에 속한 브엘세바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홀로 광야로 들어갑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기도합니다. 로뎀나무는 겨자나무랑 비슷합니다.광야에 뜨거운 태양볕이 내리쬡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서, 사람 키만한 싸리나무 같이 생긴 로뎀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엘리야가 기도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서론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에, 영적으로나 삶적으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학업에서나,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거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 않는 것.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 않는 것, 울어도, 화를 내도, 원망해도, 어쨌건 신앙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을 가질 때에, 반드시 응답하시고, 회복시켜주시사, 선한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의 은혜를 믿으시고, 또한 체험하고 전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만지심의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어떤 큰 상처를 받았을 때에, 영적으로나 삶적으로나 큰 아픔을 겪었을 때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누군가 내 옆에 그냥 있어주는 겁니다. 그저 조용히 내 편 되어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어주옵소서.” 완전히 지쳐버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잠을 주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앞서 기도싸움에 엘리야가 얼마나 영적으로 힘이 들었을까요? 엘리야는 하루 종일 기도싸움을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30킬로미터의 거리를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려갑니다.  이어서 이세벨의 말을 듣고,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치는데, 그 거리가 약 150킬로미터입니다. 그 다음 브엘세바에서 광야로 하룻길, 한 30킬로미터를 또 홀로 걸어갑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잘 해석해보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잠을 주셨다기보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마음적으로 완전히 지쳐서 쓰러져 기절한 것과 같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져 깨웁니다.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또 잠이 듭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님의 천사가 또 다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깨웁니다. “일어나 먹으라.” 엘리야는 일어나 또 먹고 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저 지친 영혼에게 잠을 주시고, 주린 영혼에게 먹을 것을 먹이십니다.


이 모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낙심한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로 떠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노라.” 하지만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빈그물, 지금 제자들의 영적인, 마음적인, 육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그 현장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을 향해 꾸짖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빈배를 가득채워주시고, 먹을 것을 먹이십니다. 저들의 영적인, 삶적인 모습을 만져주시고, 채워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에 말씀하죠. “너희 중에 누구든지 부족한 자가 있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빈배와 같은 우리들, 지쳐 쓰러진 우리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채워주시고, 쉬게 하시고, 먹이실 뿐 아니라, 일어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이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영혼에, 마음에, 삶에, 가정에, 직장에, 자녀손들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결국 감당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엘리야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 그러니까 이제 도망쳐서 죽기를 구하는 겁니다. 하지만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고백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40일을 밤낮으로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이릅니다. 브엘세바 근처의 로뎀나무에서 호렙산까지의 거리는 약 300킬로미터입니다. 계산해보면, 300킬로미터의 거리는 보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왜 4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는 40일의 여정 속에 엘리야는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엘리야의 낙심된 마음이 확 바뀐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저 혼자 남았습니다. 뭘 할 수 있을까요?”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명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죠. 세 가지입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맡기신 사명이었습니다. 자신이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확하게 엘리야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끝까지 주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후에 이 모든 사명을 다 마친 엘리야.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게 하심으로 자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도 감당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면 우리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명, 교회에서 맡기신 직임과 직분,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물론이거니와 내 사업장에서,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해서, 내 삶의 모든 분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아가는 자, 하나님께서 힘 주시고 능력 주시고 붙잡아 주심으로 다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내 삶의 영적인, 마음적인, 육적인, 내 삶의 모든 자리 속에서의 상실의 아픔, 낙심의 아픔 속에서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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