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8) 그리스도의 사람들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8) 그리스도의 사람들 <사도행전 11:19~30>

할렐루야! 거룩한 주님의 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주의 임재의 영광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본문 26절 후반부에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이제 저들만의 정체성이 담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 뜻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다시 말해 오늘의 제목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이 곳 뉴질랜드도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많은 키위들이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정신은 점점 사라져가는데, 기독교문화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의 신앙고백적인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인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많은 기독교 기반의 국가가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생겨난 용어가 “명목 상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럼 그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의 사람들” 이건 그냥 어떤 공동체를 소개하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가 아닙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이 말은 능력의 이름이었습니다. 구별된 이름이었습니다. 경외의 이름이었습니다.그러면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붙잡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복음의 열정을 지닌 자입니다. 로제타셔우드 홀이라는 감리교 여성 의료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스물 다섯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43년 동안 의료 선교와 맹인들을 위한 선교, 또 여성 교육 및 아동 교육에 일생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이 정말 잘 되어있죠. 그런데 그 모든 의료의 기반을 선교사들이 세운 것입니다. 한국의 유수한 모든 교육기관들 역시 선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와 희생의 열매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저들은 어떻게? 왜? 당시에 정말 알지도 못하는 조선 땅에 와서, 그렇게 모든 수고와 희생과 사랑과 섬김으로, 생명을 버려가면서까지, 가족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그들 모두 복음의 열정을 지닌 자였기 때문입니다.우리도 작게나마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는 여러분 정성으로 드려주신 선교헌금을 가지고, 토고, 피지, 파라과이, 마다가스카르, 모리타니, 잠비아, 우크라이나 등, 해외 선교지에 선교비를 지원했습니다. 매년 선교비를 늘려가는 중에 있습니다.더불어 5월 말에 여선교회에서 피지선교를 위한 바자회를 할 터인데, 함께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직접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 뒤에서 돕는 사람, 또한 함께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의 사명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이 나오는데,예수 믿는 사람 잡아서 때리고 죽이고...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을 갑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도망가면서, 가는 곳마다, 뭐하고 있나요? 복음을 전합니다. 지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도망가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 속에 복음의 열정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그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서 말하는 겁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다. –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저 죽는 줄도 모르고, 예수 십자가만 전하는 사람들이다”. 이게 그리스도인에 담긴 의미입니다.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인정받을만한 사람들은, 그 속에 복음의 열정을 지닌 자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내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서, 더불어 내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또한 함께 깨어 기도함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 힘써 감당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으니, 바나바입니다. 22절 말씀과 같이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안디옥에 교회를 세운 인물입니다.바나바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구브로 섬에서 태어난 레위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이며,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교회에 헌신하고 사명자의 길에 들어섭니다.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실상을 파악하고자 바나바를안디옥으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본문 24절에 바나바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바나바는안디옥에 새롭게 세워져가는 믿음의 공동체를 향해 23절과 같이 권고합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그 결과,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초대교회의모교회와도 같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며, 성도들간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믿는 사람을 더하게 하심으로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먼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주를 향한 믿음, 예수 십자가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자라는 믿음의 정체성이 확고해야 합니다. 더불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불어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만 좋아서, 영적으로만 충만해서, 신앙생활만 잘해서, 교회에서만 좋은 모습이라서, 이게 끝이 아닙니다.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예의있고, 매너있고, 인격적이고,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 교회를 통해 믿는 자를 더해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을만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고, 또한 이를 통해 우리 뉴질랜드광림의 제단에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날마다 더해주시는 역사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합력함으로 선을 이루어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모두가 함께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자입니다. 본문의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선교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회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우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에, 항상 출발하던 장소가 이 곳 안디옥입니다. 그래서 안디옥을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라고도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교사로 선택을 받고, 파송을 받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앞서도 말씀드린대로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앞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고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사도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인물입니다.바울이 사명감에 불타서 불도저같이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면, 바나바는어떻게든품어안고 용기를 북돋아 권면하면서 함께 가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다 바울 같으면 상처 받는 사람이 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 바나바 같기만 하면 일이 제대로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잘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 같은 사람과 바나바 같은 사람이 함께 협력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공동체의 힘, “너와 나”의 힘은 단순한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가진 힘은 합력함에 있는 거죠. 세상의 군대도 숫자는 많은데, 서로 합력하지 않으면 오합지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적은 숫자도 하나로 똘똘 뭉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교회의 모습도 보십시오.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 중심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 교회입니다. 당시에는 혈통적인 구분이 얼마나 강했는지 모릅니다.그럼에도 저들이 함께 돕고 협력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 속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속회에서, 선교회에서도, 우리 교회 전체에서, 또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걸음이 닿는 곳, 기도가 닿는 곳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감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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