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1 :올 블랙스 럭비 선수 - 조나 로무 ((Jonah Lomu)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41 :올 블랙스 럭비 선수 - 조나 로무 ((Jonah Lomu)

일요시사 0 941 0 0

<1975년 5월 12일~2015년 11월 18일>



키위 마음에  '도전 정신' 심어준  '사람 불도저' 


오늘날까지 전 세계 럭비선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나 로무는 키위에게는 ‘신화’ 같은 존재다. 

그가 보여준 야성의 질주와 난관에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자 노력한 모습은 지금도 

키위들의 가슴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뉴질랜드 역사는 그를 불굴의 스포츠맨으로 기억하고 있다.



 “카 마테, 카 마테! 카 오라, 카 오라.”(Ka mate, ka mate. ka ora ka ora.)

 위아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넓은 운동장에서 펼치는 한 편의 쇼(Haka, 하카)는 뉴질랜드에 사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비장한 감동을 안겨 준다. 뉴질랜드 국민 스포츠로 통하는 럭비하면 국가 대표팀인 올 블랙스가 떠오른다.  

올 블랙스를 빼놓고는 뉴질랜드 스포츠를 말할 수 없다. 럭비는 뉴질랜드 삶의 일부분이다. 올 블랙스가 경기를 하는 날에는 시내가 한산할 정도로 온 국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런 면에서 럭비를 모르고선 진정한 뉴질랜드의 맛을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럭비가 나를 악에서 구원했다” 털어놔

 

조나 로무는 1975년 5월 12일 통아(Tonga,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푸케코헤(Pukekohe, 오클랜드 남쪽에 있는 동네)에 있는 웨슬리 칼리지(Wesley College)를 마쳤다. 학창 시절부터 럭비로 이름을 날렸다. 슬럼가에 살았던 그는 주위의 말썽 피우는 친구들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럭비에만 전심전력을 다 했다. 만 17세 이하 럭비 대표와 뉴질랜드 중등학교(칼리지, College) 대표선수로 뛰며 ‘럭비 인생의 트라이’를 꿈꿨다. 훗날 그는 ‘럭비가 나를 악에서 구원했다’고 털어놓았다.

1994년 6월 26일 조나 로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올 블랙스 역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선수(만 19세 45일)라는 명예를 얻은 날로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마누카우팀(Manukau Team, 오클랜드 남쪽에 있는 클럽 럭비팀) 윙(Wings, 등 번호 11번 또는 14번. 주로 걸음이 빠른 선수가 맡음)으로 뛰고 홍콩에서 열린 7인 럭비 경기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장본인이었지만 주위 눈길은 냉정했다. 순간동작이 느리고 연습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올 블랙스 선수로 뛰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며 따가운 질타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감독과 코치들은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조나 로무를 믿었다.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선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올 블랙스는 준결승전까지 거침없이 이기고 또 이겼다. 럭비 강국인 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팀이 차례대로 쓰러졌다. 이 월드컵 무대의 주역이 조나 로무였다.

 2m에 가까운 키(195cm)에다 120kg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가 파란 잔디를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게다가 100m를 10.8초에 질주하며 빠른 몸놀림을 과시한 그는 말 그대로 성난 코뿔소 그 자체였다. 조나 로무를 지켜본 세계 럭비 팬들은 경탄을 그칠 줄 몰랐다.

 


잉글랜드 시합서 트라이(Try) 네 번 성공


 럭비 월드컵은 조나 로무의 독무대였다. 키위들은 물론 전 세계 럭비 팬들은 조나 로무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럭비 천재에게 거는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준결승전에서 맞붙은 잉글랜드와의 경기였다. 올 블랙스가 45대 29로 이긴 이 경기에서 조나 로무는 해트트릭을 넘어서는 네 번의 트라이를 해냈다. ‘럭비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영제국(잉글랜드)의 깃발이 무참히 찢기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부터 영국 언론은 앞다퉈 조나 로무를 커버 페이지에 실었다. ‘사람 불도저’라는 애칭도 생겼다. 덩치가 산만한 상대방 선수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볼을 뺏기지 않고 트라이 라인(Try Line)에 럭비공을 내려놓았다.

올 블랙스는 남아공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12대 15로 아깝게 졌지만 승패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나 로무가 뛰는 시합 그 자체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고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조나 로무는 뉴질랜드 영웅 자리에 올랐다. 취미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로 많은 키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만하거나 건방지게 행동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자란 그는 겸손한 모습으로 럭비에만 집중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병이 그에게 찾아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장병에 걸리고 말았다. 일주일에 몇 번 정기치료를 받으면서도 가끔 시합에 나가 ‘럭비 영웅’에 걸맞은 실력을 뽐냈다. 

그렇게 몇 해를 경기장 안과 밖에서 버티며 제대로 된 럭비 세계로 돌아가기를 꿈꾸었지만 그에게 내려진 마지막 진단은 이른 시일 안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평생을 휠체어에 기대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였다. 럭비선수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었다.

  


전성기에 신장병으로 운동장 떠나

 

다행히 신장이식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섰다. 수술을 잘 받은 그는 내려놓았던 꿈의 불씨를 다시금 지폈다. 파란 경기장이, 수많은 관중이 그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2005년 1월 럭비 선수로는 나이가 좀 많게 느껴지는 서른 살의 조나 로무는 기자회견을 통해 럭비를 다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6월 조나 로무는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경기장에 섰다. 럭비 팬들은 병을 딛고 럭비 구장에 오른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 주었다. 조나 로무는 전반전에 트라이 하나를 성공함으로써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어렵게 다시 일어선 조나 로무는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전반전 경기에서 어깨를 다쳐 벤치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끝난 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미처 다 쓰지 못한 럭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접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선수로 뛸 수 없게 된 그는 대신 노스 하버팀(North Harbour, 오클랜드 북쪽에 있는 클럽 럭비팀) 코치를 맡아 럭비공과 함께한 삶을 꾸려 나갔다.

 


혜성처럼 나타나 불꽃처럼 사라져

 

상대팀 선수들은 조나 로무에 대해 “그가 태클해 오는 것을 상상하는 악몽을 꿀 때마다 몸서리를 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럭비 역사에 혜성처럼 나타나 불꽃처럼 사라졌지만 뉴질랜드 럭비 역사에는 거목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 럭비선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나 로무는 키위에게는 ‘신화’ 같은 존재다. 그가 보여준 야성의 질주와 난관에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나고자 노력한 모습은 지금도 키위들의 가슴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뉴질랜드 역사는 그를 불굴의 스포츠맨으로 기억하고 있다.


글_박성기


* 조나 로무는 2015년 1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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