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5 화가 - 찰스 골디 ((Charles Goldie)
<1870년 10월 20일~1947년 7월 11일>
한평생 마오리 초상화에만 전념…“혼을 그려냈다”
명성과 인기를 한 몸에 얻기는 했지만 평단으로부터
화가가 아닌 사진사 같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들어야 했다.
초상화를 너무 꼼꼼하게 묘사해 ‘그림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비평가는 찰스 골디 작품은 “화랑이 아닌 인종학 박물관에 더 어울린다”고 비아냥거렸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글로 쓰는 게 대표적인 방법이지만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도 귀한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있다. 신화 속 인물인 단군을 영정사진으로 만든다거나 1천여 년 전 사람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 그런 것들이다.
찰스 골디는 초상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뉴질랜드 대표 화가다. 그가 그린 초상화 수백 점에는 마오리의 얼과 역사가 담겨 있다. 초상화로 뉴질랜드(마오리)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보헤미안 풍 색채 많이 써
찰스 골디는 1870년 10월 20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여덟 남매 가운데 둘째로 세상 빛을 본 그는 큰 목재상을 하다가 오클랜드 시장까지 지낸 아버지 덕에 유복한 집에서 걱정 없이 살았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찰스 골디는 오클랜드 그래머 스쿨에 다니면서 여러 미술상을 휩쓸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하던 목재업을 도우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 화폭에 자기 꿈을 담았다.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온 스승 존 스틸(John Steele, 1842~1918)의 영향을 받아 찰스 골디 역시 보헤미안 풍 색채를 많이 썼다. 초창기에 그가 그린 정물화 두 점은 화단의 눈길을 끌었다.
1893년 찰스 골디는 예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들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4년에 걸친 유학 기간 여러 차례 주요 상을 거머쥐며 먼 타국에서도 예술혼을 맘껏 보여주었다.
루브르 미술박물관에 있던 명작들을 베끼는 훈련을 하고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같은 유럽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미술 세계를 분석해 나갔다. 그때 적지 않은 뉴질랜드 화가 지망생이 유럽에서 그림을 공부했지만 찰스 골디만큼 진지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운 사람은 없었다.
‘…뉴질랜드 도착’, 오클랜드 화랑에 전시
1898년 찰스 골디는 오클랜드로 돌아와 파리로 유학을 가기 전 미술교육을 받았던 스승 존 스틸과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해 존 스틸과 함께 큰 작품을 끝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던 제리코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Raft of the Medusa)을 본떠 그린 <마오리들의 뉴질랜드 도착>(The Arrival of the Maoris in New Zealand)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오클랜드 갤러리를 빛냈다.
찰스 골디가 그린 파케하와 마오리 초상화가 오클랜드 주요 화랑에 전시되면서 미술애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때부터 찰스 골디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4년을 미술협회에서 일하면서 찰스 골디는 마오리 초상화를 집중해 그렸다. 역사 뒤쪽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마오리 이미지를 제대로 기록해 내겠다는 뜻이었다.
찰스 골디가 마오리 초상화(얼굴 문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스승 존 스틸 영향 외에도 영국 에든버러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동생 윌리엄의 공이 컸다. 윌리엄은 형에게 인류학 관련 자료를 꾸준히 보내 주었다. 마오리 부족 멸종에 대비해 역사기록 차원에서라도 마오리 추장들 초상화를 많이 그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타깝게도 윌리엄은 1904년 목숨을 잃었지만 찰스 골디는 마오리 연구를 그치지 않았다. 역사가와 신문기자가 쓴 마오리 자료를 읽으며 그들을 어떤 모양으로 화폭에 담아야 할지를, 화가를 넘어서 역사가 차원에서 다루었다.
찰스 골디는 마오리 추장들을 한 사람씩 초대해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들은 찰스 골디의 진정성을 이해했기에 모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 주었다.
총독 부인 랜펄리 여사가 작품 두 점 사
찰스 골디 작품이 미술 애호가로부터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뉴질랜드 15대 총독의 부인 랜펄리 여사(Lady Ranfurly)가 영국 귀임 환송파티 때 <다비 앤드 조앤>(Darby and Joan)과 <더 위도>(The Widow, 과부)를 사면서부터다. 그 뒤 찰스 골디 작품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으로 인정받았다.
명성과 인기를 한 몸에 얻기는 했지만 평단으로부터 화가가 아닌 사진사 같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들어야 했다. 초상화를 너무 꼼꼼하게 묘사해 ‘그림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비평가는 찰스 골디 작품은 “화랑이 아닌 인종학 박물관에 더 어울린다”고 비아냥거렸다.
찰스 골디는 1919년까지 해마다 열리는 정기전시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큰 작품 대신 작은 작품 위주로 그려 가면서 신념을 지켜나갔다.
찰스 골디는 나이 오십에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호주 출신 여자와 결혼했다. 시드니에서 지낸 2년 동안은 어렵게 초상화 몇 작품을 그려 낸 뒤 건강이 나빠져 한동안 붓을 내려놓았다.
초상화에 마오리 한과 분 담겨 있어
1930년 블레디슬로(Bledisloe) 총독의 격려로 찰스 골디는 오랜만에 다시 이젤 앞에 선다. 붓의 주제는 여전히 마오리족 초상화였다. 10여 해 전 작품의 모델이었던 마오리 추장들은 그의 앞에서 포즈를 잡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찰스 골디는 마오리 초상화 작업을 계속해 나가길 원했지만 대량생산 시스템에 싫증을 느껴 그림 그리는 일에 흥미를 잃어 갔다. 게다가 1930년대 불어 닥친 경제공황의 여파로 그림이 잘 안 팔리는 데다 건강이 더 나빠져 결국 마오리 역사 정리는 마침표를 찍어야만 했다.
찰스 골디가 그린 마오리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마오리의 한(恨)과 분(憤)이 담겨 있다. 한때는 뉴질랜드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뒷전으로 물러난 약자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그 한과 분을 화폭에 담아 역사 기록으로 남겨놓은 찰스 골디는 비록 가고 없지만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지금도 뉴질랜드 전국 화랑에서 후손들과 만나고 있다.
수백 점 마오리 초상화로 뉴질랜드 역사를 기록한 사람, 찰스 골디는 1947년 7월 11일 자기가 태어난 오클랜드에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