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3; 음악가 - 닐 핀 (Neil Finn)
<1958년 5월 27일~ >
젊은 키위와 함께 꿈 펼친 ‘음악 산업의 거인’
닐 핀이 뉴질랜드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살펴보자.
지난 2001년 ‘75년 동안 뉴질랜드 최고 음악 100곡’을 골라 뽑았다.
그가 만든 곡이 아홉 곡이나 들어 있었다.
‘돈트 드림 잇츠 오버’(Don't Dream It's Over) 2위, ‘아이 갓 유’
(I Got You) 11위, ‘웨더 위드 유’(Weather With You) 16위였다
역사는 꼭 훌륭한 정치가나 뛰어난 과학자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빛나는 인물이 나올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같이 웃고 울 수 있다면, 그 속에 스며든 잔잔한 삶의 애환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1960~70년대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비틀즈가 그랬고, 와이셔츠 깃을 한껏 올리고 마이크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면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대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랬다. 칠순이 다 넘은 나이에도 ‘대한민국 국민 가수’라는 대접을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조용필도 분명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교도소, 병원 찾아다니며 무료 공연
뉴질랜드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를 꼽으라면 누구보다 먼저 닐 핀을 떠올린다. 40~50대 키위들은 그가 부른 노래로 사춘기 시절과 젊은이 시절을 보냈다. 이유 없이 반항할 수도 있는 젊은 날을 노래에 젖어 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닐 핀이다.
닐 핀은 1958년 5월 27일 테 아와무투(Te Awamutu, 북섬 해밀턴에서 약 30km 떨어져 있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한 노래’ 한 그는 칼리지 때 교도소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노래봉사를 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한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었기에 맘껏 끼를 펼쳤다.
집에서도 즐거운 노래마당이 열렸다. 부모님 친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닐 핀 집에 모여 그의 노래잔치를 듣고 격려해주었다. 그 자리에는 든든한 동반자가 늘 함께했다. 여섯 살 위인 형, 팀 핀(Tim Finn)이었다. 형제가 펼치는 음악 무대는 훗날 뉴질랜드 대중음악을 이끄는 쌍두마차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뉴질랜드 텔레비전에서 ‘뉴질랜드 역사를 만든 사람 100명’을 뽑은 적이 있다. 닐 핀은 41위를 차지했고 팀 핀은 57위에 올랐다. ‘형보다 나은 아우도 가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75년 닐 핀은 칼리지를 마치고 병원에서 일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노랫가락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형은 스플릿 엔즈(Split Enz)라는 밴드를 만들어 젊은이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병원 일을 때려치운 닐 핀은 형 밑에서 도우미 역을 자청해 공연 준비 일을 해주었다. 1977년 닐 핀은 애프터 아워스(After Hours)라는 밴드를 조직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타로 들어가 리드 싱어까지 꿰차
형이 이끌던 스플릿 엔즈 단원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서 대타로 닐 핀이 들어갔다. 주 무대는 영국이었다. 곧 닐 핀은 리드 싱어로 올라섰다. 그가 직접 쓴 <아이 갓 유>(I Got You)라는 곡으로 스플릿 엔즈는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이 곡은 1980년 영국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꼽혔다.
1983년 그는 스플릿 엔즈 리더가 됐고 든든한 후원자였던 형은 아쉽게도 그룹을 떠났다. 혼자 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할 운명이었다. 한 해를 더 버틴 닐 핀은 결국 밴드를 해체했다.
대신 뜻이 맞는 폴 헤스터(Paul Hester) 크레이그 후퍼(Craig Hooper) 닉 시모어(Nick Seymour)를 끌어와 어머니 처녀 때 이름을 따서 멀레인즈(Mullanes. 훗날 Crowded House로 바꿈)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닐 핀이 음악 세계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새 마당이 펼쳐졌다. 베이스캠프를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겼다. 대중음악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진검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크라우디드 하우스가 낸 첫 앨범은 뉴질랜드 시장에서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돈트 드림 잇츠 오버>(Don't Dream It's Over)라는 곡이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재 평가를 받았다. 닐 핀의 음악이 천천히 키위들 입맛을 돋운 셈이었다.
호주 자선 콘서트 눈물바다 만들어
<템플 오브 로 멘>(Temple of Low Men)이라는 두 번째 앨범에 이어 세 번째로 나온 <우드페이스>(Woodface)는 300만 장이 팔려 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닐 핀이 이끄는 크라우디드 하우스는 영국을 넘어 미국 시장에서까지 먹혀들어간다는 사실을 밀리언셀러로 증명해 보였다.
1993년에는 <투게더 얼론>(Together Alone)이라는 앨범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이듬해 음악 잡지 ‘큐’(Q)가 주는 최고 음반상을 받았다. 1996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자선 콘서트가 열렸다. 이때 초대받은 크라우디드 하우스는 <돈트 드림 잇츠 오버>를 불러 10만 청중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그룹 활동에 흥미를 잃어가던 그는 솔로활동을 꿈꿨다. 1996년 그룹을 해체했다가 2년 뒤 <트라이 휘슬링 디스>(Try Whistling This)라는 곡으로 화려하게 다시 나타났다. 닐 핀은 음악 세계를 꾸준히 넓혀 나갔다. 오클랜드 제임스 시어터(St. James Theatre)에서 공연을 했으며, 2001년 나온 영화 <레인>(Rain)의 사운드 트랙을 맡기도 했다.
또 형제애를 과시하며 형 팀 핀과 듀엣 앨범 두 장을 냈으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Enzso)의 에디 레이너(Eddie Rayner)와 함께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두 아들, 아빠 피 이어받아 음악 활동 펼쳐
닐 핀이 뉴질랜드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살펴보자. 지난 2001년 ‘75년 동안 뉴질랜드 최고 음악 100곡’을 골라 뽑았다. 그가 만든 곡이 아홉 곡이나 들어 있었다. <돈트 드림 잇츠 오버>(Don't Dream It's Over) 2위, <아이 갓 유>(I Got You) 11위, <웨더 위드 유>(Weather With You) 16위였다.
또 스플릿 엔즈 여덟 곡, 크라우디드 하우스 여섯 곡을 합쳐 그의 노래가 4분의 1을 차지했다. 닐 핀이 없는 20세기 뉴질랜드 대중음악은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닐 핀은 호주 멜버른에서 12년을 살다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노래를 부르고 만드는데 피와 살이 되어주었던 출발점으로 다시 왔다. 가족으로는 1982년에 결혼한 아내 샤론과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 리엄(Liam)은 아버지 피를 이어받아 베차두파(Betchadupa, 영국에서 활동)라는 밴드를 이끌고 있으며, 작은아들 엘로이(Elroy) 역시 아버지와 함께 여러 공연에 얼굴을 드러냈다.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