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8; 중국 애호가 - 레위 앨리 (Rewi Alley)
<1897년 12월 2일~1987년 12월 27일>
‘뉴질랜드가 중국에 보낸 선물’…인민의 벗으로 역사에 남아
레위 앨리는 1930년대 중반,
중국 사람들이 실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운동을 펴 나갔다.
정부 고위 관리들에게 산-학 협력체제를 권고했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고독한 혁명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혁명가라니, 더구나 ‘고독한’. 하지만 어느 시대든 혁명가는 있었다. 그 혁명가가 세상을 변화시킨 건 분명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1930년대 중국에 발판을 두고 사회주의 무산 계급투쟁을 펼쳤던 독립운동가 김산(님 웨일즈가 《아리랑》에서 소개한 인물)이 그랬고, 남미 혁명영웅 체 게바라(1928~1967)와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1926~)가 그런 인물이다.
마오리 추장 이름 따 '레위'로 작명
레위 앨리.
그는 뉴질랜드가 낳은 ‘고독한 혁명가’였다. 혁명가는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다. 그가 뿌리내린 터가 중국이었고, 그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로 자리 잡았으니, 혁명은 고독했을지 몰라도 결과는 결코 고독하게 느끼지 않아도 되리라.
레위 앨리는 1897년 12월 2일 캔터베리에 있는 작은 마을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태어났다. 레위라는 이름은 마오리 추장이었던 레위 마니아포토(Rewi Maniapoto)에서 빌려왔다. 마오리 추장 레위는 1860년대 토지전쟁이 일어났을 때 뉴질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운 마오리 부족의 전쟁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레위 가족도 따라갔다. 마음껏 자연을 즐기며 살던 그는 익숙하지 않은 도시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찰스 디킨스의 소설 같은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어린 날을 보냈다. 책벌레였던 레위 앨리는 촛불 하나 켜놓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나중에 술회했다.
학창 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등학교 다닐 때 삼각법도 잘 몰라 수학선생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럭비와 조정에 재미를 붙여 학교 대표로 나가며 스포츠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형제들도 뉴질랜드 럭비 국가대표팀인 올 블랙스 선수와 교육자로 활약하는 등 뉴질랜드에서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가문이었다.
스무 살에 입대, 메달 두 개 받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레위 앨리는 육군에 입대했다. 막 스무 살이 됐을 때였다. 프랑스 전투에서 그는 눈에 띄는 공을 세워 정부로부터 메달 두 개를 받았다.
레위 앨리는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타라나키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크라이스트처치로 옮겼다. 어느 날 오클랜드 위클리 뉴스(Auckland Weekly News)에 실린 ‘적화’(Red Peril)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신해혁명(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았다. 호주 시드니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의 무전조종사 일자리를 얻었다.
1927년 레위 앨리는 상하이에서 소방관 일을 시작해 얼마 안 있어 소방감독관으로 올라갔다. 곧이어 공장감독관 직까지 차지했다. 1929년 중국에 몰아친 대기근으로 전국에서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1년 대홍수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벌어졌다. 레위 앨리는 이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중국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을 품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중국 사회의 한 식구가 되어갔다. 서양 사람이 아닌 중국 본토 사람 눈으로 중국을 보았다. 서양 문화권에서 동양 문화권으로 발판을 옮긴 레위 앨리는 중국 시(詩)에 푹 빠져 많은 작품을 영어로 옮겼다. 그 일은 50년이 넘게 이어졌다.
레위 앨리는 중국에 살면서 노예에 가까운 노동자들의 삶과 사형 집행에 분개했다. 비인간적인 행위에 치를 떤 그는 지하조직과 연결해 수천 명 목숨을 살려주었다. 또 진보적인 잡지 《중국의 소리》(Voice of China)에 글을 실어 현실을 낱낱이 폭로했다.
독특한 산-학 협력체제 구축 마련
레위 앨리는 1930년대 중반, 중국 사람들이 실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운동을 펴 나갔다. 정부 고위 관리들에게 산-학 협력체제를 권고했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중국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레위 앨리는 중국 곳곳을 여행하며 산업체 학교를 세웠다. 공장에서는 솜부터 수류탄까지 모든 물건을 생산해냈다. ‘중국판 산업혁명’이었다.
그는 낙천주의자이면서도 단호한 사람이었다. 산-학 협력 구축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새로운 일에 손댔다. 농촌에 기술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의 사회진출에 발판을 마련했다. 이 사업 역시 대단한 성공을 이뤘다. 그 가운데서도 고비 사막(몽골 고원 중부에 있음)에 세운 기술학교가 가장 걸작이었다.
레위 앨리는 1949년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자 북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해 중국 실정을 대변했다. 중국 사람과 같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일과 친 미국 정책을 쓰던 뉴질랜드 정부를 고깝게 여겼다. 철저한 중국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뉴질랜드를 잠깐 들렀을 때 정부는 그를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나라에서 온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하지만 1972년 마지막 뉴질랜드 방문 때는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을 적성국가로만 낙인 찍기에는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커져 있었다. 그는 빅토리아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와이카토대학은 그를 기념하려고 중국학과 상을 만들었다.
중국 대학에 레위 동상 건립돼
미국 작가 에드거 스노(Edgar Snow,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는 레위 앨리를 “외국인이 거의 없던 중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드러낸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레위 앨리가 끼친 공을 인정하고 동상을 세워 온 국민이 그가 걸어간 발자취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1997년 한 중국 대학에 10만 달러를 투자해 레위 앨리가 늘 품고 있었던 ‘교육을 통한 나라 발전’이라는 정신을 환기해 주었다.
레위 앨리는 1987년 12월 27일 두 번째 조국인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삶의 여정은 고독했지만 그가 떠나는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레위 앨리에게 보낸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Eternal Glory to the Great Internationalist Fighter.”(훌륭한 국제적 전사에게 무한한 영광을 보냅니다.)
헬렌 클라크(Helen Clark, 1950~) 전 총리는 뉴질랜드 정부를 대표해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한 적이 있다. 100여 해 전 남섬 오타고에서 금광사업이 한창일 때 막노동꾼으로 쓰기 위해 데려온 중국 사람을 너무 모질게 다루었다는 반성이었다.
그 많은 빚을 한 번에 갚아준 사람이 레위 앨리일 지도 모른다. 그가 60여 해를 중국에 살면서 일궈놓은, 한 뉴질랜드 사람이 보여준 빛나는 섬김이 13억 중국 인민에게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오클랜드 노스쇼어 토타라베일(Totara Vale)에 그의 이름을 딴 조그마한 공원(Rewi Alley Reserve)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