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7)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77)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 <마태복음 23장>

할렐루야! 오늘 이 새벽에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의 크신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1절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에” 여기서 “이에”라는 말씀의 의미를 찾으려면 어제 읽은 본문을 생각해야겠죠. 어제 우리가 나눈 말씀을 보면 중심되는 것이 세 번의 논쟁인데, 먼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 그리고 예수님과 사두개인의 논쟁,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논쟁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난해한 질문을 던지고, 예수님께서 그에 대해 답변하신 것이 바로 어제 나눈 22장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답변이 끝나고 난 후에, 41절부터 보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역으로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46절에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이어서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혜나 지식으로 예수님과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모든 논쟁을 종식시키신 후에 조용해진 군중들을 향해, 더불어 제자들을 향해 가르침의 말씀을 주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어떤 가르침의 내용들입니까? 먼저 1절에서 12절까지 보면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내용을 보면 당시 허례허식을 가지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선생된 자로서 서있는 자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십니다. 이어서 13절부터 36절까지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일곱 번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37절에서 39절은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이 담긴 애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책망의 말씀, 슬픔과 탄식의 말씀입니다. 그럼 이 말씀이 향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제자들과 군중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새벽에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주시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럼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과연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전하시고자 한 교훈의 내용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예수님 기뻐하시는 삶의 변화를 이루어가고자 결단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동역자와 동업자의 차이점입니다. “동역자는 어떻게 하든 내가 짐을 더 지려 하고, 동업자는 어떻게든 덜 지려한다. 동역자는 고난에 관심 갖는 사람이고, 동업자는 영광에 관심 갖는 사람이다. 동역자는 일을 많이 하려 하고, 동업자는 이익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동역자는 상대방의 수고에 관심을 갖고, 동업자는 자기의 수입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동역자는 고난에 끝까지 함께 하고, 동업자는 이익의 빛이 사라지면 가차 없이 떠난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느껴지는 차이점이 하나 있더라구요. 동역자는 남을 생각하고, 동업자는 자기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과 동역자입니까? 동업자입니까? 나와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간에 동역자의 관계입니까? 동업자의 관계입니까? 하나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에 내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지?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나의 동역자로 삼고, 저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지도자들이라고 한다는 이들을 향해 책망의 말씀을 주시는데, 책망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2절 한마디에 딱 정리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어떤 자리? “모세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위해 사용하던 건물인 회당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던 높은 의자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 옛날 광야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모세 앞에 와서 판결을 받았죠. 그러면 그게 법입니다. 무조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회당에도 그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선생 되어 그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무조건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오늘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저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저들의 가르침과 삶이 너무나 다른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전하는 율법은 그대로 따라 행하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4절부터 보면 본 받지 말아야 할 저들의 잘못된 행위들을 열거하십니다. 간단하게 한 번 볼까요? “다른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도 까딱 하지 않는다.” “행위를 보이고자 옷의 술을 길게 한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서, 또한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 “랍비라 칭함 받고, 아버지라 불리우고, 지도자라 칭함 받기를 즐긴다.” 

이러한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11절과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미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의 방향은 항상 “아래로 아래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래를 향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결국은 높임 받게 됨을 예수님 자신의 삶을 통해서 증거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이 섬기는 자로서 아래를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심을 경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불의한 모습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을 주신 후에 한 걸음 더 나아가 15절부터 일곱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서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말 그대로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이런 저주의 선포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일면 담겨 있지만, “화 있을진저”는 하나의 감탄문과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우아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아아 슬프다” 혹은 “오호! 화로다.”입니다. 담겨 있는 좀더 깊은 의미를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아하! 얼마나 끔찍한 고난을 맞게 될는지.” 그런 경우 있잖아요. “어쩌나! 저러다 큰일날텐데.” 이런 의미입니다. 결국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 안에는 불의한 모습에서 돌이키길 바라는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잘못된 지도자들의 모습에 담긴 불의함이 무엇인가? 오늘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13절에 “외식하는 모습”입니다. 비교하기를 천국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닫고, 저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고 있다고 합니다. 15절에 “교인을 만들려고 애쓰면서 정작 저들을 오히려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합니다.” 

 16절에 “눈 먼 인도자여” 맹세의 예를 들어서 헛된 가르침을 전함으로 눈 먼 사람이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3절에 “십일조는 드리는데, 정작 마음이 잘못되었습니다.” 25절에 “겉으로만 깨끗하고 속은 더러운 모습입니다.” 27절에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그 안에는 주검으로 가득차 있는 모습입니다.” 29절에 “선지자를 죽이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겼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모습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16절만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라고 표현하고, 나머지 여섯 번은 한결같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내용도 보면 한결같이 겉으로만 번지르르 하고, 속은 더러운 모습입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이 말의 본래 의미를 “가면을 썼다.”입니다.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실제인 것처럼 말이나 행동을 할지라도 결국은 연기일 뿐입니다. 지금 외식하는 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볼 때는 우스꽝스러운 광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마지막 책망인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강력한 어조로 선언하십니다. 


그렇기에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외식하는 길에서 돌이키라는 말씀, 다시 말해 겉이 아니라 속 사람의 강건함을 이루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계속 그대로 그 길을 걸어갈 때에 그에 대한 댓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임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이 말씀이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경고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가운데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역시 이와 같은 모습으로 겉만 가꾸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안에 죄가 있는데, 겉으로만 수치를 가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책망 앞에서 변명만 하면서 겉으로만 수치를 가리고자 합니다. 

불의한 모습에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의한 모습에서 돌이킬 결단과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불의한 길에서 돌이킴으로 속사람의 강건함, 정결함을 이루어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회복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책망의 말씀, 헛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간곡한 권면의 말씀을 하신 이후에, 슬픔의 탄식을 애가로 표현하십니다. 37절에서 39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에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자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안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경이 녹아 있습니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앞날과 미래가 예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38절에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자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성전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선포하신 후 약 40여년이 지난 AD70년경에 정말 예루살렘은 로마장군 티토에 의해서 실현되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파괴되었고, 성전 돌 속에 숨겨놓은 보석이 있나 해서 모든 돌들을 다 파헤쳐, 내일 말씀인 24장에도 나와 있듯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이스라엘의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39절 중반절입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어디서 본 말씀이죠? 21장에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했던 외침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외치지는 않았습니다. 주변에는 그런 소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찬송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성난 외침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 너희들이 나를 향해서 불과 며칠 전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했지만, 그 안에는 반대자도 있었고, 대적자도 있었다. 이제 앞으로 너희들이 다시금 나를 향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전심을 담아서 외치기 전까지는 나를, 메시야를, 예수님을, 구원자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미래는 누구에게 달려 있는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 본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돌이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전심을 담아 고백하는 그 마음을 가질 때에 비로소 메시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됩니까? 누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까? 누가 예수님을 만나 완전한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까? 믿음의 회복을 사모하며, 영적인 회복의 역사를 사모하며 그 마음에 전심을 담아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부르는 자의 그 회복의 역사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새벽마다 기도하고, 말씀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자 애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난 심령, 내 연약한 믿음, 자꾸만 흔들리는 나의 신앙의 걸음, 회복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나아갈 때에, 완전한 회복의 역사를 향한 성화의 걸음이 우리에게 이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 주신 참된 가르침의 말씀 붙잡고 믿음의 복된 길을 걸어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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